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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May 17. 2019

독서 일기 - 김훈<연필로 쓰기>를 읽고


연필로 꾹꾹 눌러쓴 김훈의 <연필로 쓰기>를 읽었다.

원고지에 꾹꾹 눌러쓴 책을 한 장 한 장 아껴 가며 읽었다.

<밥벌이의 지겨움>, <라면을 끓이며>의 뒤를 이어 이번 <연필로 쓰기>에도 먹고사는 일상의 비애가 느껴지고, 이 땅을 보는 안타까움이 구구절절 이어진다.

밥벌이의 도구 연필로, 실핏줄 같은 글자를 엮어 쓰며 자신의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는 김훈 작가님, 지우개 가루를 책상 위에 눈처럼 쌓으며 하루를 보내는 내공을 감히 내가 상상이야 할 수 있겠냐만은 한 글자 한 글자 피고름으로 썼을 그 원고를 이렇게 편하게 그저 감탄만 하며 읽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한 자 한 자 곱씹으며 읽었다.

첫 장에선 일산에서 20년을 살고 이제 호수공원의 산신령이 된 작가가 호수 공원을 산책하며 만난 이야기가 입담 좋게 펼쳐진다. 소소한 호수 공원의 일상은 여자 노인들의 수다와 남자 노인들의 수다에서 정점을 찍고(수면해주는 대장 내시경 병원을 찾고, 장기 잘 두던 그 친구는 이제 보이지 않고, 며느리는 요즘 것들이 되어 펼쳐지는 말들의 향연은 재미있고 찰지다.)  인공의 호수에서 작각가 만난 인간과 자연의 이야기는 호수공원 저 쪽 김포의 하늘에 노을이 지며 마무리된다.  

두 번째 이야기 <밥과 똥>에서는 이제 그의 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공교롭게도 저녁을 먹은 직후였는데, 김훈 작가님은 똥 얘기를 얼마나 리얼하게 써놓으셨는지, 읽으면서 계속 똥물이 튀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셨고, 아까 먹은 저녁밥이 똥으로 만들어지는 길과, 내 똥이 똥 처리장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다 정약용의 똥 무기까지 고증하며 똥의 긴 여행을 함께하게 된다. 게다가 취재는 또 얼마나 알차게 해 주셨는지 아주 오래전 나의 유년 시절에 똥퍼 아저씨를 생각나게 해 주시고, 그때 집집마다 똥차가 오던 날 느낀 그 냄새를 30년 만에 소환해주셔서 자꾸자꾸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과 똥>을 읽으며 작가의 치밀한 취재와 사물을 다르게 보는 그의 시선에, 그리고 그 문체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역시 김훈! 하며 혼자 흥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밥과 똥> 중..

가장 슬프고 괴로운 똥 한 가지만을 말하려 한다.

생애가 다 거덜 난 것이 확실해서 울분과 짜증, 미움과 피로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날에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별수 없이 술을 마시게 된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의 이야기다. 술 취한 자의 그 무책임하고 가엾은 정서를 마구 지껄여대면서 이 사람 저 사람과 지껄이고 낄낄거리고 없는 사람 욕하고 악다구니하고 지지고 볶다가 돌아오는 새벽들은 허무하고 참혹했다.(나는 이제 이런 술을 마시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에 머리는 깨지고 속은 뒤집히고 몸속은 쓰레기로 가득 찬다. 이런 날의 자기혐오는 화장실 변기에 앉았을 때 완성된다.

뱃속이 끓어서, 똥은 다급한 신호를 보내오고 항문은 통제력을 잃고 저절로 열린다. 이런 똥은 힘을 주어서 짜내지 않아도 새어 나온다. 똥은 대장을 가득히 밀고 내려오지 못하고 비실비실 기어 나오는데, 그 굵기는 국숫가락 같다. 국숫가락은 툭툭 끊어진다. 슬픈 똥이다. 간밤에 안주로 집어먹은 것들이 서로 엉기지 않고, 제가끔 반쯤 삭아서 따로따로 나온다. 소화되지 않은 김이 변기 물 위에 시커멓게 뜬다. 가늘고 무기력하고 익지 않은 날똥인데, 이 무력한 똥의 악취는 극악무도하고 똥과 더불어 나오는 오줌은 뿌연 구정물 같다… 사나운 냄새가 길길이 날뛰면서 사람을 찌르고 무서운 확산력으로 퍼져나간다. 간밤 술자리에서 줄곧 피워댔던 담배 냄새까지도 똥냄새에 배어 있다. 간밤에 마구 지껄였던 그 공허한 말들의 파편도 덜 썩은 채로 똥 속에 섞여서 나온다. 똥 속에 말의 쓰레기들이 구더기처럼 끓고 있다. 저것이 나로구나. 저것이 내 실존의 엑기스로구나. 저것이 내 밤이고 내 술이고 내 몸이고 내 시간이로구나. 저것이 최상의 포식자의 똥인가? 아니다. 저것은 먹이사슬에 제외되지 않기 위하여 먹이사슬의 하층부로 스스로 기어들어간 자의 똥이다. 밤이 삭아서 조화로운 똥으로 순조롭게 연결되면서 몸 밖으로 나가는 것인 아니라 밥과 똥의 관계는 생계를 도모하는 신산에 의해 차단되거나 왜곡된다. 이 똥은 사회경제적 모순과 갈등이 한 개인의 창자 속에서 먹이와 불화를 일으켜서 소화되지 않은 채 쏟아져 나온 고해의 배설물이다.   (P42)

그 중 가장 슬픈 똥을 읽으며, 나는 잠시 나의 남편을 생각한다. 작가의 말을 듣고 보니 우리 남편이 싸는 똥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똥이구나. 잦은 그의 술자리 후 문고리 닳도록 계속되는 그의 화장실 행은 “나이 깨나 먹어서 지 앞가림도 못하고, 건강도 생각하지 않는, 술이라면 그저 좋아하는 한심한 가장!”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똥은 “사회경제적 모순과 갈등이 한 개인의 창자 속에서 먹이와 불화를 일으켜서 소화되지 않은 채 쏟아져 나온 고해의 배설물”이었던 것을. 그저 모자란 남편 탓만 하고 있었으니 내 남편의 젊은 날도 안타깝다. 남편이라고 그런 똥을 싸고 싶었던 것은 아닌 데, 좋고 싫고를 떠나서 현실을 살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밥과 똥이었다는 사실에 깨달음을 얻는다. 이제 남편도 더는 슬픈 똥이 아닌 좋은 똥을 싸기를.

이제 작가도 슬픈 똥의 시간은 지나고 산신령에 버금가는 나이가 되어서인지 그의 글에서 만나는 노인들의 얘기가 더욱 공감된다.  본인은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하게 된 주례사들을 죽 나열한 ‘대체로 실패한 주례사들’은 시대의 선배가 후배들에게 해주는 주옥같은 얘기들임에도 불구하고, 결혼식 장에선 큰 점수를 받지 못했다는데, 나는 그의 주례사에 밑줄을 쳐두며 결혼할 때 미처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해 준 그의 가르침을 받고 남은 결혼 생활에 마음가짐을 다 잡아 보기도 한다.  

호수 공원의 산신령이 되어, 집 앞 소아과에 아이들과 젊은 엄마들의 아름다움을 보며, 호수 공원에서 키스하는 연인들을 축하해주고, 소주 한 병 못 마셔 사이다나 마시는 노인이 되어 가며 느끼는 작가의 회한은 늙고 있는 중인 내가 요즘 가끔 느끼는 회한과도 같다.


< 가까운 것들을 가까이 > 중

늙어서 슬픈 일이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못 견딜 일은 젊어서 저지른 온갖 못난 짓거리와 비루한 삶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 어리석은 짓, 해서는 안 될 짓, 함부로 써낸 글, 너무 빨리 움직인 혓바닥, 몽매한 자만심, 무의미한 싸움들, 지겨운 밥벌이, 계속되는 야근과 야만적 중노동… 이런 기억이 몰고 온 슬픔은 뉘우침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한이나 자책일 뿐이다. 그 쓰라림은 때때로 비수처럼 가슴을 찌른다. 아아, 나는 어쩌자고 그랬던가, 그때는 왜 그 잘못을 몰랐던가.

이보다 더 슬픈 일은 그 악업과 몽매를 상쇄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미 없다는 것이다. 나는 절벽과 마주 선다.


나도 그렇다, 단호했던 젊은 나, 타자의 입장을 알고 싶지 않던 젊은 나, 수치스러운 기억들도 함께 떠오른다.

그리고 이야기는 개인을 넘어 사회로 나아간다.

우리의 제일 아픈 곳을 돌아보고, 가장 낮은 곳의 얘기를 들어준다.

어차피 내 사는 일이 바빠서, 알고는 있어도, 금방 잊어버리기 쉬운 이야기들을 이렇게 연필로 꾹꾹 눌러써주시니 고맙기도 하고, 이런 것이 사회의 지식인, 글 쓰는 이, 어른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 동거차도의 냉잇국> 중

숨진 단원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갈 때 받은 용돈은 5만~10만 원 정도였다. ㄴ와 말을 나누었던 여러 학부모들이 그렇게 말했다. 이 학부모들은 대체로 시화공단을 중심으로 일하는 근로소득자들이거나 쇼규모 자영업자들인데, 살림 형편이 “다들 고만고만하다”라고 말했다. 수학여행 용돈 5만~10만 원은 그 ‘고만고만’한 살림 슈모에서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액수일 것이다. 이 액수에 생활의 고난과 소망의 무게가 실려있다. 고난과 소망이 교차하면서, 생활은 영원하다. 이 5만~10만 원은 삶을 통과해 나온 숫자로 거품이나 과장 없는 생활의 지표다… 막내로 태어난 한 학생은 15만 원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10만 원을 주었고 취직한 형이 3만 원, 누나가 2만 원을 주었다. 갓 취업해 받은 월급으로 수학여행 가는 막내에게 용돈 2만~3만 원을 주는 큰 자식들의 성취감과 자부심, 그 돈을 받는 막내의 기쁨(용돈은 아버지한테서 받을 때보다 형한테 받을 때 더 신난다. 이때 형과 동생은 혈맹이 된다), 그 돈을 주고받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부모의 뿌듯함- 이 작은 행복을 위해 부모는 평생의 노동을 바쳐서 자식을 기르고 가르쳤던 것인데, 이 소중한 행복은 지금 바다 밑에 잠겨서 돌이킬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사소한 것들이 부모들의 슬픔에 불을 지른다.  

<아,100원>

배달대행 라이더들은 고용 계약이 없는 개인사업자들이다. 고정급, 시간급은 없고 1건당 3천 원 정도를 받는다. 이 라이더들은 회사로부터 아무것도 지급받지 못한다. 기름값, 수리비, 사고처리비, 안전장구 값을 모두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노동자이면서 경영자인 셈이다. 배달대행 라이더들은 주 5~6일 하루 열 시간 이상 ㅜ띠어야 한 달에 250만~300만 원 정도를 벌 수 있다. 이러니 과속, 역주행, 신호 위반, 횡단보도 주행, 인도 주행, 끼어들기를 거듭해가면서 도심의 거 리를 헤집고 다닌다. 눈비가 오면 건당 100원을 더 준다는데, 100원을 더 주면 위험한 일을 시켜도 되는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 글을 읽고 다음날 한겨레에 기고한(19.05.14) 김훈의 글을 읽었다. <아, 목숨이 낙엽처럼>으로 시작되는 이 글은 고층건물 신축공사장에서 추락사하는 노동자가 일 년에 270-300명에 달한다는 뉴스를 보고,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고, 최고급 자동차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고 갤럭시를 만들고 첨단 유도무기를 만드는 나라에서 돈이 없고 기술이 없어서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는가 질문한다. 그리고 티브이 뉴스를 보면서, 방 안에서 벽에 대고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급히 몇 자 적어서 신문사에 보낸 그의 글을 읽고, 이렇게 부지런히 잊지 않고 써주는 그의 연필에 감사할 뿐이다.

두서없이 적다 보니, 굳이 내가 김훈 작가님의 글에 토를 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읽는 내내 이런 작가님의 계신데 굳이 내가 뭘 쓴다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든다.

이렇게 좋은 글을 이렇게 잘 쓰는 분이 계신데 감히 내가 뭐라도 쓴다고 하는 것도 웃기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독서일기를 적는 것은 순전히 나를 위한 기록이다. 진심으로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고맙기 때문에.


흠뻑 취해서 읽고, 딸에게 정약용의 똥 폭탄 얘기를 들려줬다. 3기 신도시 뉴스로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는 일산을 보다가, 김훈 작가의 애정이 절절 묻어있는 호수와 이야기와 산신령이 있는 일산을 생각한다. 작가는 이렇듯 같은 곳에서 다른 것을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 문장은 우리 딸에게 읽어 주고 싶은 문장.

<별아, 내 가슴에 > 중

이제 서울의 밤하늘에서 별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별들은 인간의 시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별을 보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은 불행하다. 아이들은 자신의 불행을 모른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자란다. 아이들은 먼지의 장막 뒤에서 별들은 빛나고 있다. 별들은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

딸아, 우리 함께 별을 본 적이 언제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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