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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May 28. 2019

식탁 일기 - 장미가 피는 계절에는

15   달간 시리아, 터키, 요르단, 이집트 배낭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오던 날엔 아파트 담에는 빨간 장미가 한창이었다. 여행하는 기간 동안 40도를 넘는 더위와 붉은 사막, 모래 바람 등은 당시엔 난생처음 경험해본 것이었고, 정말 배낭을 어깨에 메고 행군하듯 다닌 여행도 처음이었다. 본능으로만 살던  달여간의 여행을 마치고 우리  아파트 담장을  두른 빠알간 장미들을 보고야 " 여기가 한국이지" 하고 현실을 깨닫고, 마치 생전 처음 장미를  것처럼  빠알간 색깔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달간 전혀 보지 못한 색이었고 장미였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때가 바로 이 때여서, 지금도 5월 말이 돼 아파트에 장미가 피기 시작하면 그때가 바로 떠오른다. 두 달간의 여행을 마치고 만난 빠알간 장미 덩굴과 그날의 날씨, 냄새, 온도, 바람이.


카카오스토리의 배려로 요즘 나는 아침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1년 전 당신은?  오늘의 추억을 찾아봐요, 하고 당시의 게시물을 보여주는데

5월은 나에게 여행의 달인지

18년 5월엔 제주에 17년 5월엔 수원 친구 집에  16년 5월엔 내내 헬싱키, 프라하, 뮌헨, 스위스에  있었다는 알림이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이미 나에겐 먼 기억 속의 이야기인데 사진 속의 우리는 얼마나 즐거워 보이는지 작년 5월 제주엔 이상 기온으로 5월에 강풍과 비가 불어 우리는 경량 패딩을 벗지 못하고 바다에 발 한 번 담가보지 못한 채 여행을 했고, 그 원하는 수영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딸애는 조카들과 차에 실려 여기저기로 여행을 다녔다. 딸과 조카들이 쪼르르 셋이 앉아 셋다 입을 벌리고 떡실신한 사진을 친절히 카카오스토리가 나에게 배달해주었다.

17년 5월엔 어린이날은 전후로 아무 약속도 계획도 없는 나와 우리 대학 친구들은 마음씨 좋은 수원 친구네 집에서 1박 2일을 하며 수원 구경을 했다. 불과 2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애들은 수원 화성 따위는 상관없고 똥 박물관 이런 것에 열광하는 조무래기 수준의 꼬꼬마들이었는데 지금 사진과 비교해보니 그 아이들은 2년 동안 폭풍 성장을 거쳐 있었다.  

16년 5월은 내내 내게 축제 같은 시절이었는지, 우리 가족은 16년 5월 13일에 헬싱키에 도착, 서울 날씨와 비교해 너무 추워 깜짝 놀랐으나 처음 느껴본 북유럽 분위기에 엄청 흥분해 있었으며  헬싱키에서 북유럽 라이프를 따라 슬로우 슬로우하며 딸애와 함께 놀이터 투어를 하고 있었다. 사진에 우리는 너무 여유로웠으며 나는 삼 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어려 보이기까지 하다. 헬싱키를 거쳐 프라하에서 맥주와 학센을 먹고, 딸애는 여기서도 교회 박물관 따위 보기가 싫어서 우린 대충 보고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며 체코 놀이터 뽀개기를 하며 다녔고, 하필 그때 남편은 열이 나고, 딸애는 밤에 나가기 싫다는 이유로 나는 처음 가본 체코에서 야경도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숙소에서 한탄을 하고 카카오 스토리에 소식을 올리고 있었다. 그 후, 뮌헨에서 딸애는 난생처음 축구 경기라는 것을 보게 되고, 축구팬이 되었으며, 스위스에서 파란 하늘과 잔잔한 호수, 웅장한 설산과 여유로운 사람들을 보고 스위스인들을 엄청 부러워했다. 여기까지가 카카오 스토리가 보여준 나의 지난 5월의 기록, 카카오스토리만 보니 세상 그렇게 행복한 5월이 없다. 그 아름다운 계절에 완벽히 아름다운 여기저기에서 세상 행복한 모습으로 사진 찍혀 있는 내 모습이라니. 과거의 나는 이렇게 찬란했으나 19년 5월엔 딱히 이렇다 할 이벤트가 없다는 것을 핑계로 나의 카카오스토리 사진첩은 지난 연말 화려했던 송년모임들 사진을 끝으로 어떤 업데이트도 되어 있지 않았다. 작년 연말에도 나는 또 이 모임 저 모임에서 온갖 맛난 것들을 차려 놓고 행복해하고 있었고, 그 연말을 끝으로 나는 카카오 스토리에도 흥미를 잃었나 보다. 그리고 문득 날짜를 보니 오늘은 5월 28일. 헉, 이제 이렇게 5월도 끝나가고 있었고, 낼모레면 6월, 그리고 19년 한 해의 반이 벌써 훅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아니 벌써, 상반기 끝이라니, 물론 늘 그렇듯이 이번 상반기에도 딱히 해놓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하반기에 그럴듯한 계획이나 이벤트가 준비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또 시간만 가고, 나이만 먹는구나. 하는 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지난 금요일, 한 때 젊음을 바쳐 일만 하던 작가 시절 동고동락하던 선후배들을 요즘 제일 힙하다는 을지로에서 만나 삼겹살을 먹고, 자리를 옮겨 와인바에서  한 잔 하는 시간을 가졌다. 23살부터 만나온 선후배들이니 벌써 20년 지기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한 때 앉았다 하면 10000CC에 소주 맥주는  당연히 섞어 마시던 그녀들과의 술자리에서 다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넷이 와인 두 병을 아주 느리고 우아하게 마시고 11시쯤 되어 밤이 늦으면 택시 타기도 무서워서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우리를 보고, 우리는 너무 낯설었다. (김훈의 에세이에 나온 종로 빈대떡집 송년회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쇠락한 을지로 인쇄소 골목 노가리 가게 앞에 넘쳐나는 스무 살 젊은이들을 보며 여기는 우리가 있기에 좀 안 어울리는 곳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그랬고, 이제 우리의 대화엔 새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해 날로 날로 자라는 아이들 얘기를 함께 나누는 것도 그랬다.  그 멤버 중 한 명은 나의 20-30대 여행을 거의 모두 함께한 언니였는데, 그녀와 함께 다닌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터키, 프랑스, 이탈리아, 캄보디아, 울릉도, 부산에서의 추억은 내 인생의 가장 황금 같던 시기의 기록이 아니었나 싶다. 낯선 젊은이들의 호의에 한 잔 하다가 권유받은 약 같은 것에 당황해 뒤도 안 보고 뛰쳐나와서 인적 없는 시리아 시내를 둘이 전속력으로 뛰어 숙소로 도망가던 일, 요르단 운전기사에 둘이 함께 속아 글로벌 호갱님이 되어 어마어마한 돈을 내고 가이드 투어를 하고, 여행 내내 요르단 기사와 말도 안 통하고 속도 터져 남 욕 하며 우정을 돈독히 쌓은 일, 걸레보다 더 더러워 보이는 걸레빵을 들고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먼저 맛본 사람이 그 빵은 신문지 씹은 맛과 같다며 알려준 일, 현지인도 위험하다고 말리는 터키 가족의 초대에 무턱대고 응해 엄청난 환대를 받고  감동해 눈물 뚝뚝 흘리던 , 지금으로선 상상도 되지 않지만 밤 새 마시고 뜬 눈으로 해운대 대구탕을 찾아가 그 속 시원한 국물로 해장하던 일, 함께 본 부산영화제에서 영화는 지금 그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내내 둘이 번갈아 자서 서로 잠들지 않은 부분만 끼워 맞춰 전혀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냈던 일 등 밤새 해도 모자란 얘기들을 풀어내며 우리는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어댔다. 그 모든 추억을 소환하며 내린 결론은 딱 하나,  “그때 그렇게 놀 기를 잘했지!”. 그때부터 여행비며 술값이며 차곡차곡 모아 집도 사고 건물도 사고 부자가 됐으면 중년의 삶은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때부터 차곡차곡 쌓은 추억으로 이렇게 꺼내볼 것이 많은 추억 부자가 되었다.


오늘도 우리 아파트 마당엔 빠알간 장미꽃이 지천이다. 비가 내린 다음 날이고, 하늘은 파랗고, 공기도 선선한 그야말로 딱 여행하기 좋은 날, 당장 떠나지는 못하지만 장미 한 송이 한 송이에 나의 즐거운 여행의 기록을 담아 젊고 혈기왕성하던 나, 걱정 없는 나, 두려움 없는 나의 모습도 같이 그리워해 본다. 이렇게 장미가 만발하는 계절에 꼭 어울리는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독서 일기 - 김훈<연필로 쓰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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