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푸레나무 식탁 Jun 12. 2019

<식탁 일기> -  여행은 무엇을 남기나?    

꽉 찬 3박 4일 부산, 경주 가족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가족 여행이었고, 먹고, 놀아보자! 고 가서 먹고, 노는데 최선을 다 한 여행이었다. 먹고 노는데 집중하여 이렇다 할 깨달음도 성찰도 반성도 없다. 여행하며 생각한 잡다한 얘기들.

     

 운전은 누가 하는가?  

남편보다 내가 운전을 오래 했다. 남편은 길치다. (어느 정도냐면 올림픽 도로와 강변북로를 구별하지 못한다. 서울 사람이다. 운전 경력 십 년이 넘었다.) 남편은 전날 피곤할 일이 많아서(?) 가족의 안전을 위해 내가 운전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 보조석에 앉아 있는 게 더 피곤하기도 하다. 이런 여타의 이유로 우리 집에서 남녀평등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 부분은 운전이다. 아니 오히려 여성 상위다. 하지만 일산에서 부산까지 운전할 생각을 하면 시작도하기 전에 오른쪽 다리가 저려 오는 게 사실이다. 사이좋게 반반 운전하기로 약속하고 시작한 여행이었다. 치사하게 반이 어디까지인지 따질 수는 없고, 사실 나는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가끔 조수석에서 코 골며 자고 있는 남편을 보면 “ 아, 나는 이제 하다 하다 운전기사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든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여행 준비의 팔 할은 맛집 찾기였다. 3박 4일 동안 밥 하지 않을 절호의 찬스다.

검증된 맛집, 검증되지 않은 맛집, 동선에 포함된 맛집, 동선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꼭 가보고 싶은 맛집을 추려 3박 4일간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하루 세 끼는 모자라다. 간식과 커피타임, 저녁에는 음주까지 하루 5-6끼를 먹고, 마셨다.  자타공인 ‘한 끼도 허투루 먹지 않는 사람’ 남편과 ‘ 입 짧은 사람’ 따님, ‘ 맛없는 거 먹으면 화나는 사람’ 나는 한 끼도 실패하지 않기 위해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최선을 다 했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까?  열심히 찾고 먹고 마신 건 좋았으나 치밀한 계획은 점점 기대치를 높였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듯이 맛집 또한 그러하여 어차피 그리 맛있다 한들 다 아는 맛이고, 온갖 블로거들과 먼저 다녀온 분들의 친절한 후기로 스포일러 잔뜩 알고 영화 본 기분이라고 할까?  원하는 것은 기대 없이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맛있는 한 끼를 먹고 난 후의 포만감인데 기대 없이 우연히 들어가 망하고 돌아올 걱정에 다 아는 맛들을 검증하고 돌아온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맛집 정보 따위 찾지 않는 동물적이고 과감한 선택은 우리 가족에게 너무 큰 도전인 걸까?   


  놀이공원은 몇 살까지인가?   

계획은 이랬다. 일요일 경주 유적지들을 둘러보고, 주말을 피해 사람이 없을 월요일엘 경주 월드에서 놀이기구 백 번씩 타고 돌아오기. 딸이 제일 기대한 것도 바로 마지막 날 경주월드에서 드라켄 타기였다. 여행 내내 경주월드를 꿈꾸며 엄마 아빠 맛집 찾아오며 가며 시간을 버릴 때 넓은 마음으로 참아주던 딸이었는데, 월요일 아침 알게 된 청천벽력 같은 소식. 티켓 구매 완료하고, 개장 시간 알아보고 있는데, 역대급 반전 상황 발생. 바로 그 날이 휴장 날이란다. 휴장이라고? 아 나는 이런 전개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휴장 소식에 따님이 몰고 올 쓰나미는 상상만 해도 치 떨리는 일, 아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하고 이 고비를 어떻게 넘겨 이 여행을 마무리 지어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입을 뗐다.

‘오늘 휴장이래.’가 떨어지기 무섭게 남편은 “그으래? 그럼 에버랜드로 가자!”라고 외친다. 이건 또 무슨 전개니, 갑자기 여기서 에버랜드가 왜 나와? 제발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보라고 했으나 “ 지금 경주월드가 문을 닫았다고 실망하지 말고, 우린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넘겨서 재미있게 이 여행을  즐기면  되는 거야. 지금 출발하면 세 시간이면 에버랜드 도착이다!”  남편의 제안에 딸은 제대로 실망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그렇다면 “에버랜드다!” 고 덩달아 외치고, 그저 침착하게 생각해보라는 나만 이상한 사람, 사실 어제 경주를 다 둘러본 것도 아니고 박물관이며  한옥마을이며 천천히 보고 가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두 사람. 그렇게 오래 운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오자마자 바로 경주를 떠나야 한다니 아쉬움만 잔뜩 안고 경주를 떠났다.


나도 원래 놀이공원을 좋아한다. 놀이기구 타는 것도 좋아하고, 놀이 공원 특유의 그 환상적인 분위기도 좋아한다. 2년 만인가? 그때만 해도 놀이공원은 너무나 즐거웠었는데, 개장하자마자 들어가서 문 닫을 때 나오고도 아쉬웠는데, 이제 더 이상 놀이공원이 즐겁지 않다. 입구를 들어서면 깔리는 놀이공원 BGM에 딸은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했으나 나는 심드렁했고, 형형색색 동화 같은 놀이공원도 그저 그랬다. 너무 많이 온 걸까? 너무 나이가 많은 걸까? 놀이기구도 세네 번씩 연달아 탔던 나였는데, 한 번 타고 내려오니 이제 너무나 속이 메슥거리고, 내가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희귀 동물 판다를 보고, 장미정원에 앉아 꽃구경을 할 때였다. 딸에겐 그 모든 시간은 다 의미 없고 그저 놀이기구를 한 개라고 더 타기 위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으니 이제 이 아이의 다음번 놀이공원은 친구들과 함께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이제 놀이공원은 졸업할 나이가 되었나 보다.


   그리고, 손흥민   

이번 여행의 잊지 못할 한 순간을 꼽자면 월드컵  A 매치 한국 vs 호주전 관람이다. 2002년 월드컵을 뜨겁게 보낸 세대지만  축구는 TV로만 봤다. 딸에게도 직관은 처음이다. 빨간 원피스를 둘이 맞춰 입고 한 첫 축구 직관. 사실 부산 여행 첫날,  축구경기가 있단 남편 말에도 그냥 시큰둥, 앞자리 예매할까 했을 때도 별 기대가 없어서 그냥 싼 거로 하라 했었다. 직관은 처음이라 어떤 분위기인지 상상도 되지 않았고. 내심 TV로 보는 게 훨씬 편할 거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 시간 전에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부산은 붉은 물결. 15년 만에 열리는 축구 경기에 아시아드 경기장은 이미 흥분상태였고, 아시아드 경기장 입장객 수만 5만 3천여 명, 응원 열기는 후끈했고, 나는 손 선수의 실물과 플레이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 난생처음 직관이란, 손흥민이란. 그의 화려한 플레이를 맨눈으로 본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이거면 됐다 싶었고, 그 후 계속 검색창에 손흥민을 검색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여행은 무엇을 남겼나?   

그리하여 우리는 엄청난 빨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냉장고와 숙제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3박 4일 내내 12시까지 쏘다니며 논 대가로 집에 오자마자 피곤이 밀려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기는 죽을 만큼 힘들었다.

다음날 딸은 숙제를 다 하지 못한 채 학교에 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학원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집에 돌아와 못다 한 숙제를 또 밤늦게까지 하고 잤다.

나는 냉장고를 채우고 빨래를 세 번째 돌리고, 중간중간 청소와 잡무, 밀린 수업과 보충 수업을 했다.

여행 내내 비와 비구름을 보여준 날씨는 일상이 시작되자마자 미세먼지 하나 없는 그림 같은 파란 하늘을 펼쳐주며 우리의 일상을 축복해주고 있다.

집은 가끔 우리에게 지겨운 일상과 상처의 쇼윈도(김영하-여행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3박 4일 만에 도착한 집은 편안한 안식처였고, 내 손으로 해 먹어 지겹기만 한 집밥도 오늘은 우리 가족이 먹기 좋은 착한 밥상으로 느껴진다.  

다행히 무사히 돌아와서 또 떠날 수 있다.


덧, 몰래 본 딸애의 일기장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 그래서 우리 가족은 이번 여행에서 깨달은 게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리 꼭 전화를 해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경주월드 휴장의 충격을 적은 대목인데, 이번 여행은 딸에게 계획의 중요성을 알게 된 여행인가 보다.


작가의 이전글 식탁 일기 - 장미가 피는 계절에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