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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Jun 21. 2019

식탁에서 독서 일기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자의 글쓰기

평화로운 일주일이었다.

먹고, 자고, 일하고, 밥하고, 읽었다.로 간략히 정리되는 한 주일이었다.

남편이 나의 신경을 긁지도 않았으며, 딸과의 작은 충돌도 적정한 수준에서 잘 해결했다. 가고 싶지 않은 모임에 참석해 억지로 웃고 있지도 않았으며,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아 생체리듬의 변화로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오늘은 금요일, 일주일 내내 뭔가 쓸 거리가 필요하다고 계속 생각했으나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것들을 떠올려 봤으나 전부 시시했고, 이미 내가 한 얘기 거나 남들이 한 얘기였다. 하는 일이라곤 오늘도 삐걱하지 않고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다 보니 짠~하고 특별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꺼내 쓸 수가 없다. 꺼냈다 하면 자꾸 옛날 얘기라 슬프다. 그렇다고 부지런히 나가 무엇을 취재할 여력도 없고, 그렇다고 사고 한 번 쳐볼까 해 봐도 딱히 칠 사고도 생각나지 않은 종류라 할까. 그러니 재미가 없다. 오늘은 재미도 없는 것을 굳이 쓰고 있는 나의 성실함에 점수를 주기로 했다. 재미는 없을 수 있으나 이것은 성실한 일주일의 기록이라고 하자.

이번 일주일 동안은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았다.

다음 달에 아이들과 수업하는 책들을 읽어놔야 할 주간이기도 했으며, 도서관에 신간이 많이 들어와서 잡히는 대로 가져오다 보니 빨리 읽어야 한다는 마음에 읽고 치워 버리기에 급급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기대 없이 읽었는데 새로 들어온 책 칸에서 고른 책들이 다들 좋았어서 짧은 서평을 남기기로 한다.


< 아무튼, 식물-임이랑>

<아무튼> 시리즈가 괜찮다는 얘기를 들었긴 했으나 <아무튼> 뭐부터 읽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첫 책으로 <아무튼-식물>을 들었다.  손에 들어오는 식물이라곤 다 죽이고 보는

똥 손인지라 이제 내 생애에 식물 키우기는 없어라고 생각했으나 올 겨울 이사 가면 큰 나무 한그루와 고만고만한 허브들을 집에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맞는 식물은 어떤 게 있나 알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리하여 <아무튼-식물>을 읽으면 아무튼 나에게 뭐라도 맞는 식물 하나쯤은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서.

책으로 만난 저자 임이랑은 노래를 만들고, 베이스를 연주하는 연주자이자, 식물을 키우고 글을 쓴다. 화분 한 두 개를 시작으로 집에서 백 가지가 넘는 식물들을 돌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베란다 가득 화분을 채워 키우는 건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식물의 세계란 알면 알 수록 복잡하고 어려워서 각각의 식물들을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키운다는 것은 애 하나 키우는 것만큼 힘든 일이란 사실이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베란다에 있는 식물들들 전부 집안으로 들였다가 다행히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서 또다시 식물들을 다시 베란다에 옮기고, 비가 온다며 식물들에게 영양가 가득한 빗물을 먹이겠다고 온 집안 식물들을 베란다에 또 이사를 시키고, 겨울엔 추워서 여름엔 더워서 각각 식물들의 자리를 다시 배정해주고, 적당한 조도와 습도와 바람을 제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의 이야기도 흡입력 있다. 식물을 대하는 작가의 시선과 애정이 읽는 동안 내게도 전해져서 나도 이번엔 뭐라도 제대로 키워보자는 작은 결심을 하고 어제는 아보카도를 발라 먹고, 씨를 깨끗이 닦아 물에 반쯤 담가놓았다. 이렇게 물에 담가 놓고 해를 쪼이고 바람을 맞혀주면 아보카도 새싹이 올라온다는데, 그 놀라운 생명의 신비를 나도 한 번 느껴보고 싶어 졌다.


< 나의 책 읽기 수업 - 송승훈 >

아이들과 책을 읽고, 수업을 하는 일을 하다 보니 토론 수업, 책 읽기 수업, 독후감 쓰기 등등을 키워드로 한 책을 많이 읽게 된다. 송승훈 선생님의 책은 지난해 < 한 학기 한 권 읽기>에도 도움받은 부분이 많았다. 이번 책 읽기 수업에서는 실패와 성공담이 공존하며, 상위권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독서 수업에 의지가 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끌고 갈지가 담겨 있어 더 도움이 많이 됐다. 사실, 수업을 하러 오긴 하지만 이 책을 왜 읽는 거며, 이 수업을 왜 하는지 , 쓰라고 해서 쓰긴 하지만 정말 한 줄도 못 쓰겠는 아이들도 있는지라 20년 독서 교육을 한 송승훈 선생님의 이야기는 내게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아주 알차다. 1교시 이렇게 하면 망한다, 2교시  사람답게 읽기, 힘들지만 글쓰기, 3교시 좋은 사람으로 잘 살기 위한 책 읽기, 4교시 책 읽기는 모든 과목에서 가능하다 5교시 책과 함께, 학생들과 함께, 부록까지 모든 장이 다 현장에서의 경험에서 다져진 이야기이기에 더 귀하다. 책 읽기 수업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이들이 보기에 이미 그 일에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보일 텐데,  바로 그 점이 아이들이 읽고 쓰는 데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가 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책 읽기도 좋은 사람으로 잘 살기 위한 책 읽기가 되어야 하니 잘 읽고 잘 쓰는 아이들이 더 잘 쓰게 해주기만 하는 수업이 아니라 함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수업을 하는 시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다시 한번 다 잡게 되었다. 꼭 독서 교육을 하는 관계자뿐만이 아니라 아이의 독서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부모들도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왜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었을까? - 한상수>

<누가 민주주의를 훔쳐 갔을까? -김은식>

<신곡- 단테>

중 1, 2학년 수업용으로 읽은 책들이다.

제목만 보면 딱 재미없게 생겨서 아이들이  아 재미없겠다 할 부류다.  

하지만 이런 청소년용 인문 사회 책들은 알기 쉽게 설명돼 있어서 그 분야의 지식을 쉽게 얻고자 하는 성인들이 보기에도 훨씬 편하고, 이해도 쉽다. 함무라비 법전과 민주주의 역사를 전공책 수준으로 본다고 생각해보라 읽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왜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었을까?>는 함무라비 법전의 탄생과 배경, 법전의 구체적인 내용을 청소년들이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이다.  인류 최초의 법전이라는 수식어로 소개되는 함무라비 법전에 대한 오해와 진실과 함께 당 시대의 생활상을 법전을 통해 짐작해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알려진 ‘탈리오 법칙’의 숨겨진 의미와 약자를 보호하고 백성들의 삶이 질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법령들이 현재의 법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과거와 현재의 법과 시대상, 미래의 법은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하게 될지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누가 민주주의를 훔쳐 갔을까?-김은식>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자유와 평등, 투표와 권리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되는 청소년들에게 이 땅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뿌리내리게 됐는지, 우리 땅의 민주주의의 역사에 어떤 희생들이 있었는지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이다. 늘 한국 근현대사 책을 보며 외우기만 했던 역사 속 사건들을 설명하며 민주주의의 기나긴 여정을 소개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학생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기대되는 책이다.

<신곡-단테>

단테의 신곡이라니. 하아 이런 책까지 읽게 될 거라고 생각 못했는데, 도덕 시간, 윤리 시간에 제목으로만 만난 단테의 신곡이다. 제목만 봐도 무지하게 재미없고, 따분하고, 꼰대 같은 얘기만 할 것 같다는 불안감에 폭풍 걱정을 하고 첫 장을 넘겼다. 어 근데, 이건 의왼데? 생각보다 쉽다. 다행이다. 아주 고전적인 내용이다. 단테와 함께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며 각종 인물들의 천태만상을 만난다. 단테는 친절하게 인간이 지옥과 연옥에 가지 않으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준다. 인간이 존엄을 지키고 바르게 살기 위한 방법은 사실 이렇게도 단순한 것인지 1265년에 태어나 1321년에 생을 마감한 단테가 얘기하는 인간의 조건과 현대를 사는 인간의 조건은 다를 바 없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김영민>

세간에 회자되는 ‘추석이란 무엇인가’의  그 교수님이다.

이미 베스트셀러인 책이라 책 소개는 필요 없겠지만 김영민 교수 특유의 위트와 젠체하지 않음이 맘에 들었다. 서울대 교수이고,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 받으신 분이 유학생 시절 돈 몇 푼 벌어보겠다고, 사자 인형 가죽을 뒤집어쓰고, 인형 옷 바지 앞뒤를 바꿔 입어 사자 꼬리를 앞에 입고 손을 흔들어 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깔끔하고 지적이며 재미있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삶에 대한 통찰과 애정 또한 빛난다. 몇 개 없는 스펙만 보고 짐작하자면 그는 충분히 기득권자인데 책 속의 그는 그렇지 않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도 많았다. 담담하지만 재미없지 않고, 읽으면 유식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재미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아서 휘리릭 읽고 던져두기엔 아깝고 생각할 얘기들이 많다.  그래서 역시 추천.


이렇게 쓰고 보니 금요일 오후 3시 57분.

“불금”을 외치고 싶지만 이렇다 할 계획이 없다.

딸은 닭고기 덮밥을 주문하고 갔는데 냉장고에 계란이 한 알도 없어서 일단 계란을 사다 놓고 딸이 오기 전까지 저녁을 준비하고 저녁을 먹고, 치우고 이제 좀 앉아 볼까 하고 앉아서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하나 보면 ‘불금’도 절반은 지나있을 것이다.  김영민 교수 말처럼 행복의 계획은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준다. 별 계획이 없으므로 이 불금도 또 슬그머니 지나갈 것이다. 그저 소소한 근심들을 하며 (오늘 예능에 헨리가 먼저 나올 것인가, 남궁민이 먼저 나올 것인가,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는데 저녁은 얼마나 먹을 것인가, 냉장고에 하이네켄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 나도 오늘의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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