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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Jul 08. 2019

식탁 일기 -  나의 소울 푸드

섭씨 35도가  넘는 더위에 폭염 경보가 울리는 날. 

  거실 바닥의 찬 기운이 그대로 맨 발바닥에 전해지며 으슬으슬한 기운이 온몸으로 신호를 보낸다. 불길한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  왼쪽 관자놀이에서 편두통을 시작으로 아랫배가 싸하더니 뒷목이 조여 온다. 시작된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피할 수 없는 그날이.

 이렇게 심하진 않았는데, 긴 목 양말을 주섬주섬 꺼내 신고, 맨다리에 레깅스를 걸쳐 입어도 추위가 가시지 않는다, 7월인데. 소화도 되지 않고, 배는 고프지만 잘못 먹었다간 체할 것 같다. 이제 막 끓인 보리차에 김을 호호 불어가며 마셔도 상태가 좋아질 것 같지가 않다. 이번 달에는 좀 아프고 시작하려나 보다. 온몸이 퉁퉁 붓고, 머리는 조여 오고, 저녁 시간이 다가와도 괜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조금 있으면 딸애가 “배고파.” 하고 들어올 시간인데, 저녁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내 입맛이 없으니 뭘 하고 싶지도 않다. 급한 대로 냉장고에 반찬들을 주섬주섬 꺼내 계란말이 하나 두툼하게 올려 저녁을 차린다. 기름에 계란물을 지지는 고소한 냄새가 나지만 전혀 식욕은 동하지 않고 어서 하루를 마치고 눕고만 싶은 날이다.

 전날 점심때부터 다음날까지 꼬박 36시간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엔 소화가 되지 않아 못 먹었고, 나중엔 입맛이 없었고, 시간이 지나 머리가 띵할 정도로 공복감이 밀려왔으나 먹고 싶은 것이 없었고, 중요한 것은 뭔가를 차려 먹을 기운이 없었다. 나는 엄마랑 같이 살고 있지 않으니 아무리 아파도 누구 하나 내 밥상을 차려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보살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침대에 누워 고스란히 혼자 아프고 있자니 한 때 나도 엄마의 보살핌을 받았던 시절이 방울방울 떠올랐다.


  오늘처럼 내가 몸이 으슬으슬 춥거나 감기 기운이 드는 날에 엄마는 북엇국 끓였다. 기력 없이 누워 있는 내 머리맡에 앉아 황태를 손으로 잘게 잘게 찢어, 들기름에 달달달 볶다가 고소한 향이 나면 물을 붓고 감자를 넣어 푹 끓이고 계란도 하나 풀어 파를 송송 썰어 살짝 끓여내던 북엇국. 북엇국 끓이는 고소한 냄새가 집 안에 퍼지면 슬그머니 일어나 앉아 엄마가 쟁반에 바쳐 오던 북엇국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이부자리에서 밥 먹기는 평소에는 누릴 수 없는 호사다. 앉은자리에서 그 북엇국 호호 불어가며 몇 숟가락 떠먹고 나면 없던 입맛도 돌아와 밥까지 말아 한 그릇 뚝딱하게 됐다. 뜨끈한 국물이 온몸에 퍼지며 차가웠던 몸에 온기가 돌고, 그렇게 한 그릇 먹고 슬슬 졸다가 일어나면 고단한 몸도 어느 정도 회복하게 해주는 마법 같은 나의 소울 푸드, 북엇국. 그래서 이 삼복더위에 벌벌 떨며 아프면서 생각난 것은 엄마의 북엇국이었다. 고소하고 시원한 국물을 몇 번 떠먹고 나면 금방 괜찮을 것 같은데, 엄마는 멀리 있고, 어렵지도 않은 북엇국 내가 얼른 끓여 먹고 기운 좀 차려야 되겠다 생각했지만 침대에서 일어나 앉을 때마다 골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골을 부여잡고 일어나느니 그냥 누워서 자는 게 낫다는 생각에 이틀을 내내 누워 있었다. 아무리 아파도 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이젠 두통이 아니라 배가 고파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이렇게 끙끙 앓다가 밤에 일어나면 엄마는 시원한 보리차 물에 밥을 살짝 말아 배고프니 한 두 숟가락이라도 먹으라고 보리차 물에 밥을 말아 주곤 했는데, 열나는 밤에 그 보리차에 만 밥은 또 얼마나 맛있던지. 가족들이 모두 자고 있는 새벽에 작은 불 하나 켜 놓고 앉아, 엄마가 떠먹여 주는 보리차를 제비 새끼처럼 따박따박 받아먹던 밤도 생각난다. 밤새 아프다가 보리차라도 좀 마실까 하고 주방으로 나가보니 이미 끓여 놓은 보리차는 이미 바닥이 났고, 보리차 대신 생수라도 마셔보지만 이 물은 그때 그 물이 아니다.     


 할머니가 편찮으시던 날도 생각난다. 그런 날에 엄마는 굴과 황도 통조림을 사 가지고 들어오셨다. 그 시절엔 황도 통조림은 너무 귀하기도 하고 맛있는 것이기도 해서 이럴 때나 가끔 맛 볼 수 있는 것 중에 하나였다. 할머니 편찮으신 옆에서 황도 하나씩 받아먹던 기억과 함께 엄마가 “ 할머니 입맛 없으시니 너희는 하나씩만 먹어라.” 하면, 할머니는 “입맛 없으니 애들 더 줘라.”하고 실랑이를 했었다. 동생과 나는 바짝 붙어 앉아 과연 황도는 우리에게 몇 개나 돌아올 것인가 잔뜩 기대를 하던 날들이었다. 아파서 입이 쓸 땐 황도 통조림이 제격이라는데는 의의가 없지만 굴은 왜 하필 굴이었나 이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아플 때는 소화력도 떨어지니 고기 대신 바다의 우유라는 영양식 굴로 기력 보충을 하라고 황도와 함께 굴을 내드렸던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엄마가 아픈 날도 있었다. 엄마는 몸이 약해 자주 아팠는데, 그럴 때는 아침에도 일어나지 못하고 밤새 앓고 기력을 차리지 못할 때가 많았다. 우리 때는 학교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그럴 때면 할머니가 새벽같이 일어나 우리 도시락을 대신 싸주고, 늘 늦잠으로 아침도 안 먹고 가는 내게 맛소금과 깨, 참기름을 넣고 손으로 꼭꼭 쥐어 동그란 주먹밥을 만들어 입에다 쏙쏙 넣어 주시곤 했다. 아침 안 먹고 가면 배곯아서 공부 못한다는 잔소리와 함께 짭조름한 주먹밥을 받아먹다 보면 아침 안 먹는다는 얘기가 무색하게 밥 한 공기보다 많은 양을 받아먹고 있기도 했다.

 방학이면 엄마보다 할머니가 더 바빠졌다. 그때 엄마는 젊었고, 각종 봉사에 대외활동에 바쁘셨는데, 엄마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할머니 때문이었다. 나른하고 무료한 방학 땐, 할머니가 내오는 간식들을 먹는 게 낙이었다. 계란을 잔뜩 풀어 밥통에 폭신하게 쪄 낸 밥통 카스텔라, 우엉과 양파를 채 썰어 튀겨 아~ 뜨거워 하며 바사삭 베어 먹던 야채 튀김, 여름엔 수박을 잘게 썰어 사이다만 부어 줘도 꿀맛이었다. 장마에 비가 요란하게 오면 지글지글 기름에 호박을 채 썰어 전을 부치고, 갓 캐온 포슬포슬한 감자를 짭짤하게 삶아 배고플 틈이 없게 간식을 내주던 할머니. 겨울 하루는 온 가족이 모여 만두를 만들었는데 장독대에서 시원하게 익은 김치를 잘게 다져 각종 버섯에 두부를 잔뜩 넣고 만두피까지 직접 밀어 동그란 만두를 몇 백개씩 만들어 냉장고에 차곡차곡 쟁여뒀다. 그렇게 만들어 둔 만두를 겨울 내내 쪄먹고, 구워 먹고, 끓여 먹고, 부숴 먹다 보면 긴 겨울 방학도 지나고 있었고, 그래도 출출한 밤엔 할머니가 굵은 가래떡을 석쇠에 올려 구워 주면 꿀을 푹 찍어 먹곤 했다. 건조해서 갈라진 입술에는 꿀이 좋다고 가래떡에 묻은 꿀을 입술에 바르며 립스틱 인척 바르며 놀기도 했다. 입가심으로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음료수처럼 들이켜면 늦은 밤 먹은 가래떡도 금방 소화가 됐다. 어디 이뿐이랴 사계절 할머니가 해준 간식만으로도 한 페이지는 다 채울 수도 있다. 그땐 할머니가 해주는 간식이 그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 얼마나 귀찮고도, 어려운 일인가. 지금처럼 인스턴트 제품이 풍족하던 시절도 아니었고, 외식을 자주 하던 시절도 아니었는데, 뒤돌아서면 배고픈 성장기 어린이 둘을 배고플 틈도 없이 메뉴 바꿔가며 간식을 해대던 할머니는 보통 부지런한 분이 아니셨던 것이다. 달랑 딸 하나 키우고 있으면서도 방학이면 삼시세끼 밥 할 생각에 기운이 다 빠지고, 방학식 전에 각종 냉동식품 떨어지지 않게 채워 넣어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지금의 나와 참 비교가 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틀을 꼬박 아프고 난 후, 겨우 일어나 냉동고 속 황태채를 꺼내 살짝 물에 불려 들기름에 조물조물 무친다. 냄비에 살짝 볶다가 물을 부어 진하게 우려낸다. 어제오늘 그렇게 쓰기만 한 입맛도 이제야 좀 진정이 돼서 입맛이 돌기 시작하고, 뽀얀 국물에 국간장과 소금으로 살짝 간을 하니 감칠맛이 돈다. 처음 결혼하고 끓였던 북엇국은 양파를 너무 많이 넣어서였던 걸까 국이 왜 이렇게 달고, 물은 또 얼마나 한강처럼 부어 건더기를 찾을 수 없었던지. 분명 엄마가 알려준 순서대로 했는데도 비리고 달아서 남편은 한 숟가락 먹고 말없이 수저를 내려놨다. 나는 맛은 없지만 멀쩡한 재료를 생으로 버릴 수 없다며 억지로 북엇국을 꾸역꾸역 먹고, 다음날 남은 북엇국은 도저히 못 먹겠어서 남편 몰래 남은 국을 냄비째로 버렸다. 그리고 결혼한 지 12년째, 이제 북엇국쯤이야. 36시간 공복 후에 먹는 북엇국은 얼마나 꿀맛이었던가. 엄마의 병치레로 식탁 위엔 북엇국 하나가 전부였지만 그 진한 북엇국 맛에 딸은 밥 한 공기를 다 먹고도, 내 밥을 한 숟가락씩 더 가져가며 최고를 연발한다. 아팠던 이틀 내내 출장갔다 돌아온 남편은 냄비에 남은 북엇국을 보고, 저녁을 먹긴 했으나 한 숟가락만 밥을 말아 볼까나 하더니 냄비를 비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딸도, 남편도 엄마의 북엇국을 먹는다. 내가 어릴 적 시름시름 앓다가도 일어나 호호 불어 마시고 기운이 솟던 그 북엇국.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들어온 세 식구에게 허락된 소박한 한 끼다. 함께 둘러앉아 북엇국을 먹으며 저 너머의 시간에서 유독 힘들었던 날, 엄마가 끓여주던 북엇국의 맛을 어렴풋이 기억해본다. 이 맛인 듯, 아닌 듯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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