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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Feb 07. 2020

독서 일기 -나대면 얻을지어니

이다혜의 <출근길의 주문>을 읽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스물셋의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채로 시작한 사회생활에서 나는 너무나 어리고 여자인 채로 꽤 오랜 시간 막내이기까지 했다. 이십 년 전의 나는 이 책 속의 남자 상사와 동료들이 젊은 여성들에게 은근히 요구하던 것들이(여자는 쿠션어, 여자어를 쓰고, 질문은 나중에, 듣는 사람이 될 것 등)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고, 때로 거북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문득 거북스럽다가도 가끔 당연하게 생각되기도 했는데, 뭐 인간 대 인간으로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기도 하고, 굳이 정색하고 나면 오히려 더 피곤해지기도 하니 그러려니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나는 그네들이 원하는 어린 여직원이 해야 하는 일들을 자처하기도 하며 싹싹함과 상냥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와 장녀 콤플렉스, 슈퍼우먼 콤플렉스로 범벅이 된 나는 꼭 남자 직원들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여직원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드라마 캐릭터처럼 야망을 갖고 성공을 위해서 내 감정을 속이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내가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자연스럽기도 했고, 나에겐 그렇게 못 참을 만큼 싫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가 나에게 대 놓고 "이런 일은 어리고 여자인 네가 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배운 가정 교육과 여학생의 신분으로 배워왔던 몸가짐의 소산이었다고 할까? 그렇다고 이 책을 읽고 이십 년 전의 내가 왜 그렇게 상냥하고 싹싹한 척을 했나 하고 후회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40이 넘어 이러저러한 사회생활을 하는 지금도 최대한 타인들에 상냥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여성 직장인들이여 쿠션어, 여자어 따위는 쓰지 말고, 무조건 세게 말해라! 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며 이십 년 전의 내가 생각난 지점은 바로 여기다. “ 예의 바르게, 상대 기분 상하지 않게 에둘러 말하기를 여성에게만 가르치는 것은 그만두자. 남자가 말할 때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은 표현이나 문장을 여자가 말했다고 발끈하는 일을 그만둬라. 이것은 여성에게 무례하라는 권고가 아니다. 여성과 남성 모두 타인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잘못한 사람이 당당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예의도 뭣도 아니다.... 쿠션어, 여자어를 쓰지 않는 노력을 하는 만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다른 여성(특히 당신보다 나중에 태어난 여성)이 쿠션어, 여자어를 쓰지 않을 때 거북해하기를 그만두기다. ” 상대에 대한 예의바름과 상냥함과 싹싹함에 대한 책임을 은연중에 어린 여자에게 전가하고 있었던 사회의 분위기. 과거의 내가 문득문득 잘못된 건 아니지만 거북한 기분이  들었던 사소한 순간들은 이처럼 아주 은밀하고 암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둔한 내가 이십 년 만에야 눈치챌 정도로!


이 책은 이다혜 기자가 일터의 여성들에게 필요한 말, 글 네트워킹에 대해 쓴 책이다. 

오늘도 기록을 경신하며 마흔이 넘도록 여자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일하고 버티며 체득한 방법을 <출근길의 주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처세술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이럴 땐 이런 센스를! 여자 직장인이여 이렇게 하면 사랑받는다!라는 류의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는 책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쉽게 도마 위에 오르는 일터에서 여성들의 네트워킹을 만들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명랑하게 균형을 잡으라고 말한다. 막장 드라마에서처럼 여자의 적은 여자가 되어 여자의 자리를 끌어내지 말고, 여성이어서 겪는 불합리에 침묵하지 말고, 오히려 솔선수범하여 여자의 비수를 여자가 꽂지 말고, 여자들이여 연대하라고!

저자가 이십 년 간 일터에서 버티고 체득한 이야기가 너무나 현실적이고 리얼해서 아 내가 십 년 전에 경단녀가 안 되었으면 이 모든 말과 시선을 다 견디고 과연 버텨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래저래 계산기 돌려보니 워킹맘으로 일하며 그 말과 시선, 눈치를 견디지 못할 게 분명하고, 그렇다고 정말 그렇게 일을 잘하지도 못하면서, 내 자식 하나 잘 키울 자신도 없는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편이 버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라 당연하게 경단녀의 삶을 선택한 나는 십 년 전에 내가 이 책을 읽었으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본다. 일과 가정, 독박 육아의 굴레에서 헤엄치다가 망신창이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나이 사십이 넘어서 일터에서 꿋꿋하게 버텨주는 언니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이다혜 기자가 꿋꿋하게 버틴 이십 년과 오늘도 갱신하고 있는 현역에서의 하루하루에 아낌없는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못해낸 그것, 직장에서 여성으로 당당하게 살아남아 여자의 길을 만드는 것. 이 땅의 용기 있고 똑똑한 여성들이 더 멀리, 더 오래 여성들의 자리를 만들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또 하나 이다혜 기자의 마지막 인사처럼 많은 여성들이 함께 일할 날을, 함께 응원할 기회를, 세상을 바꿀 날을 만드는 데에 나 또한 빠지지 않고 끼어 보기를!     



* 기억에 남는 문장들 

- 그림 값이 세계 최고가라는 데이비드 호크니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면 그조차 온갖 해시태그를 달아놓는다. 물론 그 계정을 본인이 아닌 홍보 담당자가 운영할 가능성도 높겠지만, 데이비드 호크니도 안 떠는 우아를 내가 뭐라고?     


- 가면 현상이라는 용어가 있다고 한다. 성공한 사람들이 느끼는 세 가지 유형의 감정인데 첫째,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느낌. 둘째, 자신의 성공은 순전히 운이 좋은 덕택이라는 생각. 셋째, 자신이 일군 성공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 (중략) 좋은 기회를 얻으면 나의 부족함만 드러나리라는 생각에 기회를 흘려보낼 핑계를 먼저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 하나만 명심하려고 한다. 내가 얻는 좋은 기회는 (미래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과거의 퍼포먼스의 결과다. 과거의 내가 열심히 해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내가 두려워하지 않아야 미래의 내가 더 좋은 기회를 얻으리라.     


지난 몇 년간의 나를 함축하는 문장들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도 안 떠는 우아를 떨며 나를 알아봐 주길 바라다가 진짜 누가 알아봐 주기라도 할까 무서워서 꽁무니부터 빼는 꼴이라니! 그리하여 나는 2020년의 목표를 “나대기.”로 하기로 한다. 이다혜 기자의 혼자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십계명 제1 계명이다. 나대자. 나대지 않으면 이 또한 사라지고 말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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