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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Apr 24. 2020

독서 일기 – 청량하게 읽고 싶은 날의 책

가볍고 싶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잡념들을 멈추기 위해 가볍고 발랄한 책을 읽기로 한다. 잘 읽고 있던 안나 카레니나는 하권 중반부를 읽다가 잠깐 멈추기로 한다. 카레니나가 일단 브론스키와 함께하기로 했다니 잠깐 러시아를 떠나보자. 뭔가 톡 쏘는 게 필요하다. 나의 뇌는 가볍고 발랄한 적당히 시원한 탄산수 같은 것을 원한다. 너무 달거나 맹맹하거나 탄산이 과해도 싫다.     


고르고 골라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들었다. 둘 다 젊은 작가라니 그녀들의 재기 발랄함은 어떤 탄산수보다 나의 뇌를 시원하게 해 주리라 기대하면서.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미래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각각의 단편 소설집이다. 디스토피아가 된 미래도 있으며, 그 와중에 귀엽고 따뜻한 미래와 미래인도 있다. 김초엽은 포항공대 출신의 작가로도 알려져 있어 이과 작가의 문학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김초엽 작가의 SF 단편은 뭔가 튼튼한 이론이 받쳐주고 있어서 더욱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지식과 상상을 한 올 한 올 엮어 만든 새로운 세계를 그려 보여주는 능력에 감탄했다. 거기에 하나 더 그 미래의 세계들에서 느끼는 작가와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놀랍도록 인간적이어서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기도 했다.


여러 개의 단편이 있지만 그중 좋았던 것은 < 공생가설 >과 <관내분실>.

<공생가설> 외계인이 인간의 탄생과 유년 시설까지 인간의 뇌에 들어와 공생하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는 가설이 모티브가 된 이야기다. 황당한 얘기지만 인간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뭔가 모를 그리움이 우주 어딘가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이 태초 인간의 뇌에 공생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작가의 상상도 좋았고. 거기에 또 하나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의 이유가 그 외계인 뇌 보모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무의식과 감정들 그리고 기억도 안 나는 유년의 시절이 그리운 이유도 정말 그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관내분실>

죽은 이들의 행동과 패턴을 읽어 업로드해두는 미래의 도서관에서 엄마가 사라졌다. 주인공은 도서관 안에서 사라진 죽은 엄마의 흔적을 찾으러 다닌다.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던 엄마가 그냥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미래의 세계에서도 엄마는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하기가 힘들었다. SF 소설로 한국 과학상을 작품이지만 엄마-딸의 관계는 미래나 현재나 여전하다. 여자-엄마의 역할 또한 그렇다.     


장류진은 <일의 기쁨과 슬픔> 속 단편들은 20-30대 여성 주인공들이 통통 튄다. 똑 부러지게 일 잘하는 <잘 살겠습니다>의 주인공도 그렇고 <일의 기쁨과 슬픔>,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의 여자 주인공들도 그렇고 당차고 일도 잘한다. 그렇다면 저렇게 잘난 여자는 재수 없을 거야 결핍이 있을 거야 하는 기대도 충족시키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20-30대 여성들이 이렇다.  자기 할 일 알아서 잘하고, 계산도 똑 부러지게 한다. 삶을 즐길 줄도 아는 여자들. 멋지다. <잘 살겠습니다>와 <도움의 손길>, <백 한 번째 이력서와 첫 출근길>의 주인공들은 놀랍도록 현실적이어서 내 맘을 들킨 것 같기도 하다. 이 매력적인 현실 여자들은 그렇다고 사회에서 아직 완전히 평등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진 않는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아니라 읽기도 편했다. 가끔은 다른 이의 일상을 죄책감 없이 멀리 떨어져서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니까.      


또 하나, 작품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은 작가의 말이었다.

글쓰기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쓰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사실 답도 안 나오는 매일 같은 고민이지만. 내가 무슨 영광을 보자고 쓰고 있나 와 잘 쓰고 싶다 사이. 집어치우고 싶다와 다른 거 안 하고 쓰고만 싶다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사이 작가의 말을 보고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다.     


   장류진

-. 여기 실린 소설들은 모두 회사에 다니는 동안 발표한 작품이다. (대단하다!)

   .. 소설을 쓰는 일, 그건 내 오래고 오랜 비밀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은 늘 누군가가 귀에 대고 “네가 무슨 소설을 써? 소설을 쓰고 있네..”라고 속삭이며 하하 웃곤 했는데 그건 슬프게도 나였다. (소설을 글로 바꿔  보면 이건 내 얘기다.)    


 어느 작가의 수상 소감에서도 이제야 비로소 써도 된다는 인정을 받은 것 같다는 대목을 보고 상당히 공감했는데, 저렇게 쓰면서도 써도 되는지 아닌지가 고민이구나 싶고. 나도 써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 인정을 받으려면 더 쓰는 방법밖에 없구나 하는 교훈적인 답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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