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는 북한산에 다녀왔다. 전날 시원하게 비를 다 쏟아낸 하늘이 물기 한 점 없이 쨍하고 파란 하늘을 보여준 날이었다. 겨울이 가고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내내 딸에게 등산을 가자고 졸랐다. 코로나 시대는 집 앞 천변을 걷고, 공원을 걷고, 쇼핑몰을 걷고 또 걸어도 끝나지 않으니, 이 지긋지긋한 시기에 산꼭대기라도 올라가 보자고.
어린 시절 아빠도 주말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등산을 갔다. 주 6일 새벽같이 일어나 말끔한 정장을 입고 출근을 하던 아빠는 주말에도 역시 어스름한 새벽부터 일어나 무릎까지 오는 등산 양말에 주머니가 많이 달린 조끼를 입고, 맥가이버 칼에 스테인리스 수통을 챙겨 집을 나섰다. 새벽부터 부산스러운 소리에 잠시 눈을 떴다 아빠의 등산복 차림을 확인하고 다시 잠들곤 했다. 아빠는 대체 산에 뭐가 있다고 잠도 안 자고 주말에 산에를 가나.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빠의 등산은 늘 회사 동료들과 함께였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빠의 새벽 등산 멤버에 나도 끼어 있었다. 분명히 나는 등산은 안 따라가겠다고 엄마 아빠한테 엄포를 놨던 기억이 선명한데, 그 뒤의 기억은 이상하게 사라져 있고, 아빠와 함께 등산을 갔던 산속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즈음의 나는 사춘기여서 엄마 말도 지지리도 듣지 않는 내가 꼴 보기 싫어 그랬나 세 살 차이 동생은 늘 집에 있었고, 아빠는 나만 데리고 새벽 등산에 함께 했다. 나는 분명히 싫다고 했는데, 엄마한테 떠밀려 갔는지, 아빠한테 끌려갔는지 그도 아니면 더 이상 버티다 못해 제 발로 나섰는지 알 수가 없다. 어찌 됐든 분명한 것은 나는 뭐에 화가 났는지 화가 나서 입이 댓 발 나와 “아빠랑 한 마디도 안 할 거야.”를 맘속으로 계속 외치며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과묵한 아빠였고, 나도 그리 살가운 딸은 아니어서 아빠와 많은 대화를 하지도 않았는데 그날 등산에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절대로 아빠와 말을 하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아빠가 보기엔 평소처럼 그저 말 없는 큰 딸이었을 텐데, 나는 엄청나게 말 안 하려는 노력을 하며 걷고 또 걸었다. 코스는 늘 우리가 오르던 남한산성의 어느 줄기 어디 매였는데 혼자 올라가기 꽤 높은 바위가 나와도 절대로 손 내밀지 않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려고 혼자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날의 묵언 수행과 침묵시위는 어떻게 마무리됐더라? 산꼭대기에 도착해 아빠와 친구들이 주섬주섬 코펠과 버너를 꺼내고 프라이팬에 삼겹살과 얇은 감자를 썰어 올리며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하자 잔뜩 부어 있던 내 입이 그제야 들어갔던가. 아직 국립공원에 취사 금지가 아니던 시절, 나는 삼겹살을 지글지글 구운 기름에 바짝 익힌 얇은 감자를 집어 먹으며 등산의 재미를 처음 알았다. 아빠가 내 밥그릇에 올려준 돼지기름에 바짝 익힌 구운 감자의 맛은 산꼭대기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 중 별미였기 때문이다.
국립공원 취사금지가 조항이 없었다면 우리 딸도 산꼭대기에서 구워 먹는 삼겹살과 감자의 맛을 알고 종종 등산에 쫓아왔을 텐데, 안타깝게도 하산 후 먹는 도토리묵도 막걸리도 딸의 취향이 아니기에 친한 친구들을 꼬시기로 했다. 정상에는 안 갈 거다, 둘레길만 걸을 거다. 걷다가 힘들면 돌아올 거다. 이렇게 좋은 날에 집에만 있는 것은 죄악이다. 하산 후에 맛있는 칼국수에 팥빙수를 사줄 거다. 온갖 감언이설에 딸은 친구 동반이라는 전제하에 등산을 허락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북한산 입구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남녀노소 인종 불문하고 모인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와~ 우리 빼고 전부 등산하고 있었네, 온 김에 우리도 꼭대기까지 올라가 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등산화도 등산복도 아닌 러닝화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과연 얼마나 올라갈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됐다. 일단 초보 등산객인 딸아이와 친구들의 체력 상태를 확신할 수 없는지라 올라갈 수 있는 만큼만 가보자고 슬슬 걷기 시작했다. 어른은 어른대로, 애들은 애들대로 셋셋 짝을 지어 일 년에 며칠 안 되는 그림 같은 하늘 한 번 보고, 깊은 산속에서야 볼 수 있는 계곡 한 번 보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쉬엄쉬엄 하는 산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삼사십 분 남짓 걸으니 고통을 호소하는 딸내미들 덕에 걷는 시간만큼 긴 시간을 계곡에 발 담그고, 신선놀음을 하며 보냈다. 그저 계곡물에 발만 담갔을 뿐인데 시원한 낙수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물방울들을 보며 올여름 피서는 이거면 되겠네 싶을 정도로 피서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맘 같아서는 정상까지 안 올라가면 등산한 것도 아니야!라고 외치며 등 떠밀어 정상까지 오르고 싶었으나 그러면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 할까 봐 눈치를 살살 봐가며 마친 산행이었다. 하산 후엔 맛난 칼국수와 팥빙수까지 풀코스로 제공하고 이쯤 되면 담에 또 가자! 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얘들아 다음에 또 올 거지? 란 물음에 아니오 너무 힘들어요.라고 대답하는 열세 살의 소녀들이여. 하하. 그래 나의 열세 살에도 그랬지. 산 꼭대기에서 지글지글 돼지기름에 구운 감자쯤은 돼야 너희를 꼬실 수 있을 텐데, 다음엔 어떤 당근을 제공하고 등산을 가자고 꼬드겨봐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며 문득 아빠 생각을 한다. 삼십 년 전 아빠는 산에 오르는 내내 퉁퉁 부어 말 한마디도 안 하는 나를 뭐가 이쁘다고 주말마다 깨워 등산에 데리고 간 걸까? 나는 왜 또, 등산하는 시간보다 카페에서 노닥거리기 좋아하는 딸을 굳이 꼬여 등산을 같이 하자고 조르는 걸까? 그 또한 참,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