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는 간장 고추장아찌를 담고, 어제는 바질 페스토를 만들었다. 모두 다섯 평짜리 우리 가족 텃밭에서 재배한 식재료다. 그제는 풍성하다 못해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버린 바질 잎들을 따다 따다 지쳐 1/3만 수확하고 왔는데 친구 둘에게 나눠 주고, 내가 먹을 바질 페스토 두 병을 만들고도 남는 충분한 양이었다. 고작 1300원짜리 모종 한 포트를 산 것뿐이었는데. 이주 동안 바질 페스토 다섯 병은 만들 양을 수확했다.
상추를 비롯한 각종 쌈야채는 김치냉장고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어서 끼니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고 있다. 가지도 벌써 두 개나 열리고, 오이는 미쳐 수확시기를 놓쳐 노각이 되었으나 고추장에 고춧가루, 매실, 액젓을 넣고 무친 노각이 어찌나 맛있었는지 무치자마자 한 끼에 다 먹어 버렸다.
텃밭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내 몸은 물론 자식 하나 돌보는 것도 지치는 마당에 텃밭농사 씩이야 생각하며 밑져야 본전으로 시작한 무료텃밭이었다. 고추, 방울토마토, 양배추, 비트, 오이, 가지, 쌈야채, 바질 등등 모종을 16천 원인가 주고 패키지로 구입해, 대충 눈대중으로 심고 온 게 전부였다. 코로나 시기라 마침 주말마다 갈 데도 없었으니 딸아이랑 마실 삼아 쉬엄쉬엄 가서 하루는 지지대를 꽂아 주고, 하루는 가지를 쳐주고, 하루는 물을 주고 몇 주 지나 보니 풍성한 수확의 시기가 급작스레 찾아왔다. 뜨거운 햇빛과 가물면 찾아오는 단비를 먹고 쑥쑥 자라는 텃밭채소들을 보며 우리는 “우와~우와~” 하며 텃밭에서 몇 번, 식탁에서 몇 번씩 자연의 신비에 놀라고 경탄하곤 했다.
어제는 우연히 딸아이의 어린이집 졸업 사진들을 보게 됐다. 5살부터 인연을 맺어온 딸아이의 어린이집 친구들을 만났다. 이제 모두 13살이니 8년째. 새로 이사 온 학교에서 마스크를 쓰고 만난 친구와는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 만날 뿐이고, 무엇보다 요즘 친구가 고픈 딸아이에겐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그저 해가 뜨겁지 않은 공원에서 만나 차 한 잔을 나눠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떡볶이를 먹고, 친구 집에서 잠깐 스티커와 마스킹 테이프를 나누고, 어른들은 식탁에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뿐이었다. 8년째 늘 보는 다른 듯 비슷한 광경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이들 어린이집 시절 얘기를 하다 컴퓨터 파일을 열어 보니 5살, 6살, 7살의 딸아이와 친구들이 사진 속에서 너무나 생생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키의 반도 안 되는 꼬꼬마들이 들로 산으로 냇가로 종횡무진하는 사진을 보고 있자니 추억이 방울방울 떠오르며 뱃속을 간질였다. 포동포동한 볼에, 쌍꺼풀 진 큰 눈, 동글한 코에 지금은 절대로 입지 꽃치마를 입고 매력 발산을 하고 있는 사진 속의 딸과 지금의 딸을 비교하며 나는 텃밭에서 고추와 방울토마토를 수확할 때처럼, “우와~”하고 작은 탄식을 내뱉는다.
텃밭에 물 준 거밖에 없는데 무럭무럭 자란 식물들처럼, 그저 먹이고 입히고 재운 것 밖에 없는데 48센티, 3.34kg짜리 딸아이가 154cm에 40kg 아이가 됐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 아닌가? 토마토 한 알, 고추 한 개, 오이 하나처럼 충분한 물과 햇빛으로 여름 내내 초고속 성장을 하고 있는 딸을 보면 사실 매일 감탄과 탄식, 감사가 모자라다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한다. 그 시절 입도 짧고, 예민한 입맛으로 밥 한 숟가락에 멸치 한 마리, 콩나물 몇 줄기로 끼니를 때우던 아이는 대체 뭘 먹고 이렇게 자랐단 말인가.
텃밭 재배 승패의 여부는 물 주기라고 한다. 애지중지하는 마음으로 과도한 물 주기는 뿌리를 튼튼하게 하지 못하고, 자연환경에 스스로 적응하기 어렵게 한단다. 자주 물 주지 않아도 뿌리 스스로 흙속의 물을 찾아 수분을 공급할 수 있게 해주는 게 텃밭 농사 고수의 비법이었다. 하지만 일주일치 비 예보와 불타는 태양을 앞에 두고 적당한 물때를 찾는 것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다. 모자라지 않을까 와 그냥 둬도 될까 사이, 하루 이틀 물 간격을 늘리는 사이사이 애써 키운 농작물들이 순간의 선택으로 모조리 죽지 않을까 전전긍긍한 것도 사실이다. 초보 농사꾼은 대범할 수가 없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그랬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들, 더 해야 할 일과 그만해야 할 일들의 사이에서 진정으로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선택하는 과정들은 마치 적당한 물때를 찾지 못한 초보 농부의 심정과도 같다. 흙마다, 작물마다 모두 성장환경이 다르듯 아이를 키우는 방법 또한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텃밭 작물의 생사를 좌우한 것은 초보 농사꾼의 아슬아슬한 물 주기보다 그저 시간과 자연의 섭리였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운이 좋아 태풍도 가뭄도 장마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텃밭 재배를 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이 또한 그렇다. 아이의 행운은 온갖 위험과 불운들이 빽빽한 삶 속에서 운 좋게 큰 불행을 만나지 않아 가능한 일들일 수도 있다. 이쯤 되면 초보 농사꾼과 초보 엄마의 지분은 점점 줄어든다. 토마토 한 알, 가지 한 개, 고추 한 개, 상추 한 장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남아 있는 어금니들을 모조리 갈며 우수수 마지막 이갈이를 하고 있는 딸아이를 보며 생각한다. 이제 점점 제 세상을 꾸리는 아이에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굵은 비를 손바닥만큼 가려주고, 긴 가뭄에 목을 살짝 축여 주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일. 텃밭 일을 하듯 그저 조금은 덜 전전긍긍하는 초보 농사꾼 같은 엄마가 더 필요한 시기인지 모르겠다. 기억할 것은 텃밭의 토마토와 오이와 가지의 시간처럼, 더운 여름 아이가 보내는 이 시간도 또 무엇인가를 영글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