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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Aug 24. 2020

식탁 일기 - 책 한 권 읽으면 공차 한 잔 사줄게!

이 책  읽으면 공차 한 잔 사줄게!”

현 독서논술 쌤이자, 과거 방송작가, 대과거 문학소녀였던 엄마가 지난밤 열세 살 딸에게 내건 마지막 협상 카드다.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는데, 우리 딸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요즘 유행하는 ‘책 육아’까지는 아니어도 엄마의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가 ‘책 읽기’였던지라 아이를 책 읽는 아이로 키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책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는지 아이는 책에서 기쁨과 슬픔을 발견하고, 책 친구와 함께 충만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책 읽어라!”, “책 읽자!”는 말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고, 요즘 엄마들이 부러워하는 ‘알아서 책 잘 읽는 아이’ 였기에 사실 대놓고 자랑은 안 해도, 아이가 책 읽는 모습을 보며 내심 뿌듯해하기도 했다. 은근한 기대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알아서 잘 읽고, 책을 좋아하니 얘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군.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태기도 했다. ‘학교에 가면 빛을 발하겠지.’

이 정도 독서력과 표현력이면 학교 가면 독서록 쓰기 정도는 전교 1등을 욕심 내봐도 되려나 하고 남모르게 기대하기도 했다. 나름 독서영재가 아닐까 잠시 생각한 것은 순전히 엄마의 착각이었고, 그저 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로 판명. 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친구들과 노는 걸 더 좋아하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인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하긴 책 읽어서 꼭 독서 영재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독서록 1등 이런 것은 사실 엄마의 허세를 위한 기대이기도 했으니 실망이랄 것도 없었다. 책 읽기는 그저 일상이자 휴식이지 아이에게 책 읽기로 그럴듯한 아웃풋을 내놔라 하는 것도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물론 아이가 독서 영재였다면 나의 답변은 달라지리라.) 그야말로 나야말로 책 읽기를  힐링 시간으로 생각하면서 누가 나에게  너는 그렇게 읽으면 전국 독후감 쓰기 대회 나가서 1등 정도는 가져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얘기하면 얼마나 책 읽기가 싫어질까 말이다.


 아이의 책 읽기가 점점 스트레스로 다가온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이가 2학년부터 책 읽기 수업을 하고, 내 아이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과 독서 수업을 했다. 처음엔 우리 엄마가 책 읽기 선생님이란 자부심과 엄마가 골라주는 책은 재밌다며 엄마랑 같은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는 것을 즐거워하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달라지는데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이제 우리 아이는 ‘이제 엄마가 권하는 책은 재미없다’ 고 수많은 책들 중 엄마가 권한 책을 제일 나중에 열어보는 아이가 되었다. 그마저 열어보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어떤 책들은 엄마가 권했다는 이유만으로 책 표지도 열지 않은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엄마의 추천으론 책장에서 빛 한 번 보지 못한 책들도 친구가 혹은 선생님이 추천하면 새 생명을 찾곤 했는데, 친구의 추천 책을 열광해서 읽고 나서, ‘그거 엄마가 추천해준 거잖아!’라고 말하면 ‘그으래? 그땐 재미없어 보이던데.’로 일갈하기도 한다. 엄마의 추천 책은 뭐가 됐든 아이에겐 부담이 돼버린 것이다.  


 작가 생활을 접고, 책 읽기 수업을 하기로 한 결심엔 사실 엄마의 욕심이 얼마간 들어간 것임을 고백한다. 공부하는 엄마의 등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함께 공부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어릴 땐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 것은 그저 기쁜 일이었지만 아이가 커가고, 나 또한 변했으리라. 학습을 하는 나이가 되면서 아이가 이 책에서 이것만은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엄마의 기대를 아이가 눈치채지 못했을까? 말하지 않지만 오가는 작은 기대와 실망의 조각을 아이 역시 감지했으리라.


 오늘 아침엔 신문 기사 내용이 아이가 재미있어하는 내용일 거 같아 일부러 스크랩을 해서 식탁 위에 올려놨다. 정치, 사회, 경제 얘기도 아니고 아이가 좋아하는 동물 이야기에 컬러 화보까지 있길래 재미로 한 번 읽어 보렴하고 지나가듯 말했으나 식탁 위에 신문은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하고 하루 종일 식탁을  굴러다니다 구깃구깃한 폐지가 되어 있었다. “딸, 이것 좀 읽어 보라니까!" 하는 말이 목 구녕까지 나왔다가, 잠시 숨 고르기. ‘이깟 기사가 뭐라고 읽는데 5분도 안 걸리는 걸!’ 그저 혼자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딸에게 선택받지 못한 신문기사는 내 손으로 고이 접어 재활용 함에 집어넣었다. '왜 똑같은 것도 엄마가 하라 그러면 하기가 싫어지나.' 책 읽기에 더해, 모든 읽는 즐거움까지 빼앗을까 봐 엄마는 그저 모르는 척할 수밖에.


  수업을 하는 학부모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는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책을 좋아할까요? 집안 분위기를 바꾸기, 도서관 가기, 엄마와 함께 읽기, 아이가 흥미를 갖는 분야를 깊게 읽게 해 주기, 학습만화는 최대한 늦게 보기 등 다양한 방법을 추천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하고도 책을 향한 아이의 순수한 흥미와 기쁨을 뺏을 수 있는 단 한 가지가 있으니 이 책을 읽고 무엇을 얻었나 계속 확인하지 말기를. 아이의 책 읽기 아웃풋이 단 시간에 안 나온다고 한숨 쉬지 말기를. 책 읽기 수업 5년 차, 아이 키우기 13년 차 엄마이자 책 읽기 쌤인 내가 아이 하나를 제물로 바치고 이제야 깨달은 한 가지다.

그리하여 나는 엄마의 추천 책을 당연하게 제일 뒤로 미뤄두는 딸에게 이렇게 말 할 수밖에.  

“딸아, 이거 읽고 공차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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