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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Oct 15. 2020

식탁일기 - 열 살의 현자들

아이들과 나는 마음을 키우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밥을 먹고 잠을 일찍 자면 키가 크는데, 마음은 어떻게 키워야 할까?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그런데 저는 밥을 아무리 먹어도 키가 크지 않는데요? 

마론 인형처럼 예쁘게 말랐지만 키가 크지 않을까 봐 고민인 은지가 말한다. 

하지만 은지는 태어난 지 십 년 만에 이렇게 많이 컸는데? 네가 태어났을 때, 아마 선생님 팔 반 만 했을 걸? 

에이~ 거짓말!

열 살 아이들은 기억나지도 않는 10년 전 자신의 탄생 순간을 복기한다. 그러네! 나 정말 그때 이만했었다고?! 세상에! 여기저기 감탄사가 연발한다. 

이렇게 놀랍게 몸이 크는 사이, 너희 마음은 대체 얼마나 큰 거야? 마음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아서 알 수가 없는데?


아이들은 곰곰이 마음을 키우는 방법을 생각한다. 마음을 키우는 방법은 키 크는 방법만큼이나 모호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밥도 잘 먹고, 군것질도 하지 않는데 또래보다 작은 아이도 있고, 적당히 먹고, 늦게 자고, 단 걸 엄청 먹는 데도 또래 보다 큰 아이가 있다. 분명히 정답은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정답인지 알 수가 없다. 마음을 키우는 방법은 키 크는 법 보다 더욱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알 수가 없다. 


마음을 키운다고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마음은 그냥 컸는데요? 

밥도 안 먹었는데, 내 마음은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거지? 아이들은 신경도 안 썼는데, 쑥쑥 큰 자신의 마음이 신기하고 대견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이 만큼이나 커졌다니. 

번쩍, 서은이가 손을 든다.

선생님 저는 마음을 키우는 법을 알아요! 마음을 키우려면 자기가 누군지 생각을 해야 해요. 내가 뭘 잘하는지 뭘 잘 못하는지 잘 생각해봐야 해요. 그래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알 수 있고, 하기가 싫은 일이 뭔지도 알 수 있어요. 그래야 지금도 후회하지 않고, 나중에도 후회하지 않아요. 자기를 잘 생각해보고, 자기가 원하는 걸 하려고 해야 해요. 그래서 늘 자기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해요. 

뭐라고? 마흔넷의 나는 갑자기 나의 교실에 나타난 열 살의 현자를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본다. 

‘너 자신을 알라.’ 

요즘 난리인 테스 형을 지나, 법륜 스님과 소희 언니가 늘 하던 바로 그 얘기. 

아니 서은아 너는 그런 인생의 진리를 어디서 알았니? 

그건 그냥 지금 생각한 건데요? 

서은이가 지금 너무 중요한 말을 했어. 자기가 누군지 아는 것은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 어른이 돼서도 너희가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일이 될 거야. 자기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한 사람은 분명 자기에게 맞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거야. 자기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아마 잘 알게 되겠지? 마음의 모양은 정말 다르겠지만 자기한테 어울리는 자기만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정말 행복하겠다. 선생님도 아직 마음을 키우고 있는 중인데, 오늘 서은이 얘기를 듣고 선생님 마음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 

그럼 너희는 언제 너희의 마음이 이제 좀 컸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의 크기를 줄자로 재 볼 수도 없고, 나는 언제 큰 사람 같지? 또르르 까만 눈동자들이 구르는 소리가 진짜로 들리는 듯하다. 가끔 멋져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저는 숙제하고 있는 저를 보면 마음이 컸다고 생각을 해요. 진짜 하기 싫을 때도 스스로 할 때가 가끔 있어요. 

저는 친구랑 같이 있을 때 제 마음이 컸다고 느껴요. 친구랑 같이 있으면 그 친구 마음도 배려해야 하는데, 사실 배려하기 싫을 때도 있는데, 제 맘대로 하지는 않아요. 

저는 엄마랑 얘기를 할 때 제 마음이 컸다고 생각해요. 엄마랑 얘기하면 기분 나쁜 얘기도 하고 기분 좋았던 얘기도 하고 이것저것 얘기하다 보면 걱정이 하나도 없어져요. 그래서 엄마랑 얘기를 하면 제가 어른이 된 거 같아요. 

저는 책을 읽을 때 제 마음이 큰 거 같아요.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제 마음이 큰 건 책을 읽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마음이 크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해요. 


친구를 배려하고, 숙제도 스스로 하고, 엄마랑 대화도 하고, 책을 읽는 의젓한 아이들은 이제 제법 어른스러운 자신의 행동을 얘기하고 살짝 우쭐해진다. 


그래 아마 세 살, 네 살의 지민이었으면 친구를 배려하기 전에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울고 떼를 썼을지도 몰라, 열 살의 지민이는 싫어도 배려를 할 수 있게 되었네? 진짜, 어른스럽다! 

선생님 그런데, 어른스러운 건, 진짜 싸우는 거 아니에요? 

아하~ 그래 싸우는 어른들도 있긴 하지. 그것 또한 사정이 있을 거야. 하지만 진짜 어른 친구들은 지민이처럼 배려하려고 하지 않을까? 

근데 선생님 마음이 큰 건 막 좋은 건 아닌 거 같아요. 알아서 숙제하고, 친구 하자는 대로 하는 건 사실 내 맘대로 못하는 거잖아요. 

그러네? 마음이 크는 건, 자기 맘대로만 할 수 없는 건가? 마음이 컸는데, 왜 자기 맘대로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마음이 커도 자기 맘대로 하면 안 되는 걸까? 

그러면 뭔가 찔리기 때문일 거예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오히려 솔직한 게 아닌가? 

솔직하지만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건 엄마를 화나게 하거든요. 친구 배려 안 하면 엄마한테 혼나고, 이제 숙제도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랬어요. 

그렇구나 그럼 무조건 솔직한 거가 좋은 것도 아닌가 보다. 

선생님, 그래서 저는 맨날 알아서 잘하지는 않아요. 

저도 맨날 온라인 클래스 들으면서 딴짓하는데, 가끔만 어른스럽다는 거예요. 

야, 그건 어른스러운 게 아니라 당연한 거 아니냐? 

아니 나는 맨날 그렇게는 못한다고! 

깔깔깔깔. 


온라인 클래스와 스스로 숙제하기로 어른스러움을 논하는 열 살의 현자들을 본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게 된다는 걸까?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일의 대차대조표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며 나는 얼마 큼의 어른 레벨에 도달했는지 생각해본다. 서은이 말처럼 자기가 누군지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일을 하는, 경험치 만랩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죽도록 하기 싫은 일과 적당히 하기 싫은 일, 그럭저럭 하기 싫은 일, 죽도록 하고 싶은 일과, 적당히 하고 싶을 일, 그럭저럭 하기 싫은 일 사이에 나는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아이들이 생각하는 어른 내공 어디쯤 내가 있는지 생각해 본다.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을 건너뛰고, 죽도록 하고 싶은 일은 적당히 눈을 감는다. 그럭저럭 하기 싫은 일과 그럭저럭 하고 싶은 일 사이 어디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어른. 간신히 균형을 잡은 평균대 위에서 가까스로 서있다. 어쩜 어른이 된다는 건 그 아슬아슬한 평균대 위에서도 묵묵히 견디는 힘을 키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집어치우라며 평균대를 차 버리지도 않고, 두 다리로 꾹 버텨 서 있는 힘. 가끔 관중들의 환호에 불끈 힘이 솟기도 하는 일.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건가. 그렇다면 아직 열 살인데, 그렇게 빨리 어른이 되지는 않아도 좋겠다고. 어른들 바람처럼 바로 어른이 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한다. 이미 너희는 열 살의 현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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