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데 선생님 되게 좋아요.”
오늘로 세 번째 수업을 하는 9살 윤우의 말이다.
“ 그래, 다행이다! ”
읽고 쓰는 건 아직 서투르지만 말하길 좋아하는 윤우는 어휘 공부를 할 때마다 각 단어에 따른 에피소드를 귀신같이 찾아내 얘기해준다. ‘매듭, 구김살, 아름드리’를 배우고 9년의 인생 동안 겪은 모든 매듭과 구김살과 아름드리 이야기를 풀어낸다. 가끔은 아니 더 많이 단어와 상관없는 에피소드도 있어서 “윤우는 얘기하는 걸 정말 좋아하는구나. 근데 하고 싶은 대로 다 말하다 보면 오늘 할 거 다 못할 거 같은데?” 하고 얘기했더니, “ 아~ 선생님은 얘기하는 걸 싫어하는구나.”하고 금방 실망한 표정이 됐다. “아니야 윤우야 선생님도 얘기하는 거 좋아하는데, 얘기만 하다 보면 오늘 할 일을 못 할 수 있어. 할 일이 끝나면 얘기도 더 하다 가자.”라고 얘기하니 금방 또 얼굴이 활짝 펴진다. 윤우는 빨리 끝나면 얘기를 더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선생님이 얘기할 때마다 자꾸 생각나는 온갖 이야기를 꾹꾹 담아 눌러 가며 수업을 했다. 너무 오래 참았는지 수업 끝날 때쯤에는 지쳐서 “선생님 글씨는 안 쓰고 그림만 그리면 안 돼요? ”라고 묻고 글씨와 그림을 너무 힘들지 않을 만큼만 그리고 쓰고 갔다. 그래서인가 아직 하고 싶은 말은 다 하지 못하고 다음 수업 시간이 시작돼서 윤우는 원하는 만큼 말은 다 못 하고 선생님이 듣기 좋을 얘기만 하고 갔다. “여기 진짜 재밌다더니 그건 김서진 말이 정말 맞았어! 선생님 저는 여기 오는 게 정말 좋아요.”라고 내 귀에 캔디 같은 얘기만 하고 훌쩍 떠났다. 그저 오늘로 세 번 만났을 뿐인데, 게다가 다른 애들보다 티 나게 잘해 준 것도 없는데, 윤우의 맹목적인 애정은 어디서 온 걸까? 누구보다 황홀한 고백을 해준 윤우의 말에 어제는 내내 살짝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이들은 접대용 표정이 없다고 했던가? 이미 알고 있지만 가끔 아이들의 너무 솔직한 표정에 가끔 상처 받을 때도 있었다. 한 여름 더위에 공부하러 오느라 고생했다고 준비한 아이스크림이 하필이면 초등학교 3학년 지혜가 싫어하는 맛이었다. 지혜는 셀쭉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만 지었어도 됐는데, 다른 맛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말에 “난 진짜 독서 수업이 너무 싫어! 집에 가서 엄마한테 안 다닐 거라고 얘기할 거야!”라는 말까지 보탰다. 지혜가 삐진 이유가 아이스크림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응 그래, 그건 엄마랑 얘기해보고 다시 알려주렴.” 하고 건조하게 응수했더니 아이는 집에 가면서 그 말이 걸렸는지 “선생님 사실 아까 그 말은 그냥 한 말이에요.”라고 얘기하고 갔다. 감정 표현도 잘하고, 영리한 지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말로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친구다. 사실 뭐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아이들은 손꼽을 정도이고, 아이들은 사실 감정을 다 말로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얼굴에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 마련이라, 아 오늘은 서현이가 발표를 먼저 하고 싶었구나. 민우가 도현이 그림을 따라 그려서 도현이가 기분이 나빴구나. 민준이가 지금 매우 지겹구나. 하고 짐작하고 하나하나 말 모두 아는척을 하지는 않는다. 수업 시간에 넘쳐나는 온갖 에너지와 감정들을 다 응수할 수도 없거니와 요란하기만 한 그 감정들도 적당히 넣어두는 법도 필요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때론 아이들의 표정이 내가 기대한 것만큼 나오지 않아서 나조차도 심드렁할 때가 있는데, 작년 이맘때쯤 이사를 준비하며 정들었던 아이들과 이별을 해야 할 때였다. 3-4년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고운 소리 쓴소리 했던 아이들을 다른 선생님께 보내며 나는 아쉬운 마음이 제법 들었다. 사교육 교사와 학생이라는 일시적인 관계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헤어지는 건 처음이라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손편지도 쓰고, 이별 선물도 전했다. ‘그래 내리사랑이지. 애들이 뭘 알겠어. 나쁜 선생님으로 기억에 안 남는 게 어디냐.’ 고 속으로 위로했지만 아이들은 나만큼 아쉬워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래도 눈물은 오버지만 눈물은 안 흘려도 슬픈 표정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그저 떨떠름한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나만 아쉽네 아쉬웠어.‘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수줍게 가져온 아이들의 손편지 하나와 학부모들의 인사에 그제야 마음이 풀리기도 했다. “ 그 무표정이 사실은 아쉬웠던 거구나. ”하며.
뜬금없는 윤우의 고백을 들은 그날 저녁. 카톡 하고 메시지가 왔다. 이사 오기 전까지 수업을 하던 지훈이었다.
- 선생님
- 어 지훈아! 오래간만이다!
- 안녕하세요.
- 그래 지훈이 잘 있니?
- 선생님 아직도 독서 수업 잘하고 있어요.
- 벌써 5학년이지? 책이 많이 어려워졌지?
- 네 그래도 계속하고 있어요.
지난달에는 지훈이 동생도 뜬금없이 카톡을 보내왔다.
- 선생님 어디로 이사 갔어요?
- 어 여기 지민이네 집에서 30분 정도 차 타고 가야 해.
- 선생님 저도 이사했어요. ** 아파트로. 여기랑 가까워요?
- 가깝진 않지만 이 근처에 놀러 오면 연락해.
특별한 용건은 없었다. 그냥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던 그 선생님이 뭐하나 궁금해서 무심코 보내본 메시지겠지. 하지만 선생님! 하고 부르는 메시지에서 아이들의 표정이 딩동! 하고 떠올랐다. 눅눅한 습기와 뜨거운 열기가 빠진 청명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다. 가을의 시작과 함께 계산도 없고, 목적도 없는 순수한 안부 인사에 문득 놀랐다.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말, 상대의 기분과 나의 기분, 이익과 손해, 갑의 말과 을의 말 사이에서 골라낸 적당한 말을 한다. 좋아한다는 말이 약점이 될까, 싫다는 말로 책 잡히진 않을까 생각한다. 가끔 뜬금없지만 아이들의 말이 쉽게 잊히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