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편지 - 연휴 첫날, 집입니다
연휴 첫날, 아침 일찍 아이를 학원에 내려주고 근처 마트에 갔어요. 마트엔 사흘간의 넉넉한 연휴를 준비하며 먹고 마실 것을 사러 온 가족들로 북적였어요. 저는 연휴 동안 이렇다 할 휴가 계획도 없고, 남편도 내내 출장인지라 세일 폭이 큰 고기도, 신선한 횟감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어요. 하릴없이 간장이나 식용유 같은 생필품을 담으며, 옆 가족의 화려한 쇼핑카트를 부럽게 쳐다볼 뿐이었죠. 캠핑용 숯에 두툼한 소고기, 돼지고기, 신상 라면에 마시멜로우, 떡볶이에 어묵까지 살뜰하게 챙겨둔 카트를 보며 황금연휴를 시작하는 그 가족이 매우 부러웠어요. ‘좋겠다!’고 생각할 찰나 ‘찰싹’ 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너 엄마가 그만 좀 징징거리랬지! 엄마 발을 밟으면 어떡해! ” 부러운 캠핑 카트의 주인공인 가족이었어요. 일이 학년쯤 된 딸 둘이 엄마 바짓가랑이에 찰싹 붙어 있다가 실수로 엄마 발을 밟았나 봅니다. “좀 잘 보란 말이야! 떨어져 있어! 빨리 장 보고 나가야 하는데 왜 이렇게 징징거려!” 차가 막히기 전에 떠나야 하는 엄마, 아빠의 마음이 얼마나 급할지 상상이 됐습니다. 하지만 늘 애들은 엄마 아빠 마음은 몰라주기 마련이고, 그 사람 많은 마트에서 왜 엄마 바짓가랑이에 꼭 달라붙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아요. ‘찰싹!’은 마트에서 징징 거리던 아이가 엄마한테 등짝을 맞는 소리였어요.
“좀 그만 좀 해 좀.. 여기 도서관이야”
딸 애가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 되었을 때였어요. 1층 어린이 자료실에서 실컷 책을 보고, 딸이 원하는 책은 전부 다 빌리고, 예약해 둔 제 책을 찾으러 2층 종합자료실에 올라왔어요. 미리 예약해 둔 것도 있었지만 큰 서가에 새로 꽂힌 신간을 보며 마음이 동해 몇 권만 골라 가고 싶었죠. 어린 딸은 그런 엄마 맘은 아랑곳 않고, 제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뭔가를 요구하고 있었어요. “엄마 배고파~ 엄마 갈래~”, “잠깐만, 엄마 여기서 몇 권만 빌려서 가자, 저기 의자에 잠깐만 앉아 있어 오분도 안 걸려,” “싫어.. 같이... 같이 있을 거야”
잠깐만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주면 좋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말이 안 통하는 날이 있습니다. 조용한 도서관 분위기에 애가 말하는 소리도 신경이 쓰였어요.
“쉿! 쫌!”
하지만 아랑곳 않고 애는 징징 댑니다. “왜 그러니, 가만히 있어 쫌!” 큰 소리도 못 내는 저는 이를 앙다물고 단호하게 말했어요. 애 눈에선 글썽글썽 벌써 눈물이 나오려 준비 중입니다. 울락 말락, 도서관에서 애 울음소리가 퍼지기 일보 직전,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왔어요.
“애니까 가만히 못 있지. 애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괜찮아~ 그지?” 할머니 말씀 덕인지 다행히 딸애 눈에서 눈물은 쏙 들어갔어요. 하지만 저는 괜히 머쓱해졌어요. 애니까 가만히 못 있는 건 알지만 저도 계속 징징 거리는 애 때문에 짜증이 많이 난 상태였거든요. 한쪽엔 무거운 책가방, 한쪽엔 끈적한 아이 손을 잡고, 대출할 책을 낑낑 거리며 들고 있다가 어른한테 혼 나는 기분까지 들었거든요. 남의 일에 왜 끼어드냐고 뾰로통해졌던 건 아니에요. 애는 징징대고, 저도 이제 좀 지쳤고, 할머니의 한 마디에 저는 좀 모자란 엄마가 된 거 같은 기분이었어요. 괜찮은 엄마라면 아마 아이가 징징거리지 않게 빨리 책을 빌리고 나왔거나, 아이가 잘 알아듣게 타이를 수 있었겠죠? 혼자 머쓱해져 저는 이렇다 저렇다 말도 못 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애 얼굴을 들여다봤어요. 다행인 건 할머니의 한 마디에 애도 저도 좀 각성을 했던 걸까요. 뒷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큰 사고 없이 집에 잘 들어온 것으로 마무리됐나 봅니다.
요즘은 혼자 다닐 일이 많아서 다른 가족들이 눈에 많이 보여요. 애가 어릴 땐 우리 애 하나 뒤치다꺼리하느라 남의 집 식구들은 어떻게 사는지 안 보일 때가 많았는데, 요즘은 우리 애의 빈자리를 남의 집 애들이 대신합니다. 엄마 손에 동동 매달려 가는 꼬맹이들, 엄마 아빠 저만치 뒤에서 핸드폰 게임에 빠져 느릿느릿 걷는 어린이들, 추워서 더워서 배가 고프고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 못 가겠다고 떼 쓰는 어린이들을 보며 우리 딸 모습이 겹쳐져요.
‘ 그래, 우리 딸도 저렇게 손에 매달려 동동 거리며 점프했었지.
모래가 무섭다고 해변에 들어가지도 않고, 안겨서만 다녔었지.
저렇게 유모차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잠이 들었지.
조금만 힘들고 짜증 나면 징징거려서 혼나기 일수였지.
아이스크림이라도 손에 들려줘야 조금 더 걸어 볼 수 있었지.’
지나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딸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봐요. 언제 크려나 언제쯤 혼자 내 맘대로 다닐 수 있나 하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어요. 아이는 아이대로 학교로, 학원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바빠요. 가족과 함께 보내야지 하고 비워두었던 주말 스케줄은 아이 학원 픽업 스케줄로 채워졌습니다. 덕분에 그렇게 소원하던 혼자 있는 시간이 이제 넘쳐요. 연휴 맞이 고속도로 정체도 이제 남의 일이 되었습니다. 연휴 비 소식도 걱정되지 않아요. 비가 오면 핑계 김에 창틀 청소를 한 번 해야겠다. 이불 빨래는 못하겠네, 냉장고 재료들 소분해 놓고, 비오기 전에 한 번 걷고 와야겠다고 생각해요. 느긋하게 청소하고, 느긋하게 씻고, 느긋하게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카트에 캠핑 짐을 가득 실은 가족은 울음이 터진 딸들의 양손을 잡고 마트를 떠납니다. 이 가족은 아마 신나게 먹고, 놀며 연휴를 보내겠죠? 어쩜 아이들은 한 번쯤 호되기 혼나기도 할 거예요. 아무리 놀아도 놀아도 방전되지 않는 아이들과 달리 어른들이 먼저 지칠지도 몰라요. 어른들은 애써 준비한 야식과 술안주들은 꺼내지도 못한 채 곯아떨어질지도 모르겠어요. 전쟁 같던 육아의 시간도 지나고 나니 금방이네요.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기도 모자랄 만큼 훌쩍 지나버린 시간이었어요. 오늘도 지지고 볶으며 긴 연휴를 시작하는 젊은 부부를 보며, 들릴 듯 말 듯, ‘파이팅’하고 속삭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