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편지 - 결혼기념일
저녁 운동을 하고 들어와 냉장고에 깍둑 썰어진 수박을 꺼내먹어요.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이 갈증을 한 번에 날려 줍니다. 하나하나 집어 먹다 보니 큰 통 하나를 혼자 다 먹었어요. 여름엔 역시 수박이지! 잘 손질된 수박이 꽉 찬 냉장고는 얼마나 든든하던가요.
집에 수박이 있는 게 몇 년만인지요. 딸은 오이, 수박, 참외를 먹지 않아요. 더운 여름에 체온을 내리기에 오이, 수박, 참외 만한 게 없지만 입도 안 대는 딸 덕에 여름 과일 참외, 수박을 사 먹지 않은지 오래됐어요. 남편도 과일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고, 저 혼자 먹자고 커다란 수박을 사 오기도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지요.
수박은 남편의 결혼기념일 선물이었습니다. 과일 가게 냉장고 안에 단 하나 남은 수박을 사왔다며 남편은 호기롭게 얘기했어요. 무려 특대 사이즈 수박이라며 말이죠. 결혼기념일 선물에 왜 수박이 당첨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퇴근 후 남편은 지하철에서 내려 10kg짜리 특대 수박을 낑낑 거리며 사들고 왔어요. 저녁 수업을 마치고 주방에 나가 김치통 자리에 있는 수박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죠.
웬 수박이냐는 질문에 남편은 결혼기념일을 선물로 치라고 합니다. 딸이 안 먹어서 수박을 안 산 거지? 하며 오래간만에 시원하게 먹어 보자구요. 그걸 꼭, 오늘 결혼기념일에 사 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선물이라니 고맙다는 말은 하면서도 저는 ‘이를 어쩔고’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최근 몇 년간 수박을 사지 않았던 이유는 딸이 좋아하지 않는 과일이었던 것도 있지만 수박은 늘 둘이 먹기엔 너무 컸고, 냉장고에 둘 곳이 마땅치 않았고, 자르기가 너무 힘들고, 쓰레기도 많이 나오기 때문이었지요. 오늘은 저녁 먹고 좀 쉬어야지 했는데, 수박 때문에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남편이 커다란 수박을 썰었어요. 먹기 좋게나 예쁘게는 아니고 그냥 큼직큼직하게 썰어 시원하게 먹어보랍니다. 시원한 수박은 달고 맛있었지만 이미 싱크대는 끈적한 수박 국물이 칠갑을 하고, 남편의 칼질은 어설프기만 해서 옆에서 보고 있기에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수박 맛을 음미할 틈도 없이 어마어마하게만 큰 저 수박을 어쩔고 하는 생각에 저녁 설거지를 할 틈도 없이 수박 썰기를 시작했습니다. 큰 수박을 다 썰어줄 것처럼 하던 남편은 그새 방으로 사라지고 없었어요. 이런 선물은 정말 골치만 아플 뿐이라며 한 마디 할까 하다가 낑낑거리며 들고 온 정성도 있으니 너무 나무라지 말자고 애를 쓰며 칼질을 했어요. 찬합에 수박을 가득 채우고 나니 냉장고에 더 이상 수박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이 밤에 수박 착즙까지 해야 할 판인가 봅니다.
싱크대 밑에 꽁꽁 싸 둔 착즙기를 꺼냅니다. 워낙 부피도 있고, 설거지하기도 번거로워 어지간하면 꺼내지 않는 착즙기를 울며 겨자 먹기로 꺼냈어요. 방콕에서 마셔본 땡모반을 생각하며 화는 내지 않기로 했어요. 하지만 싱크대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쌓아둔 설거지가 한가득이고, 음식물 쓰레기통엔 수박 껍질이 넘치게 가득 차 있습니다. 착즙기로 수박 주스를 만들고, 씻고, 그릇들을 애벌 해서 식기세척기에 넣고, 싱크대를 치울 생각을 하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듭니다. 아니 왜 수박만 사다 주면 다 끝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굳이 방에 들어가서 남편을 소환해 냅니다. 나는 설거지를 해야 하고, 주방을 치워야 하니 착즙기에 썰어 놓은 수박을 넣는 일을 하라고 주문했어요. 수박 주스 만들기는 저도 처음이었는데 이상하게 수박은 착즙 되는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착즙기 앞에 붙어 서서 한참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니 남편이 그 시간을 가만히 지켜볼 리가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그새를 못 참고 자꾸 게임 모니터 앞을 오며 가며 분주합니다. 좀 제대로 하라고 했지만 자리를 뜰 때마다 얘기를 한다면 그도 아마 듣기 싫겠지요.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착즙기 앞에 서서 수박을 넣는 일을 하기로 했으나 남편은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여기저기 서성거렸어요. 시키는 것 보다 하는 게 빠른 저는 설거지와 착즙을 동시에 하는 내공을 시연할 수 밖에 없었죠.
벌써 열 시.
여덟 시 반에 수업이 끝난 저는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9시면 쉴 수 있었는데요, 오늘은 남편의 서프라이즈 이벤트 결혼기념일 선물로 저녁 먹고 단 한 번도 자리에 앉지 못했습니다. 팔자에도 없는 수박 주스를 만들며 이때쯤 한 번 버럭! 하고 싶은 기분에 한 마디 할까 말까 고민도 했지요. 꾸역꾸역 화를 참으며 이 번잡스러움이 왜 나만의 몫이어야 하는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어요. 자르고, 씻고, 치우고, 수박 주스 두 병을 만들고 나니 이번엔 끈적끈적한 수박 국물이 묻은 싱크대와 바닥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늘의 주방 마감은 아무래도 쉽지 않을 모양입니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 수박 껍질을 들려 내보냈어요. 마지막 관문으로 끈적한 주방 바닥에 레몬즙을 뿌려 박박 닦습니다. 결혼기념일 날 밤이 근면 성실하게 주방 바닥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장식될 거라고 15년 전 그날엔 정말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죠.
띠리링~ 현관문이 열리고 남편과 딸아이가 들어왔습니다.
“ 봐라, 엄마 아직도 수박 처리하고 있지?”
“ 엄마, 정말이네! 아빠가 엄마 수박 때문에 엄청 짜증내고 있을 거라고 말했어!”
“ 근데, 여보,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수박껍질 버리는데, 2.8Kg입니다! 이러는 거 있지? 낑낑거리고 사 오고, 썰고, 닦고, 쓰레기까지! 니가 왜 수박을 안 사는지 알았어! ”
결혼 15년 차, 눈치코치 없던 남편도 눈치라는 게 생기긴 하나 봅니다. 제겐 특대짜리 수박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알아차려 준 걸 고마워해야 하나요.
결혼기념일 날 밤, 오늘은 특별하게 남편의 서프라이즈 수박 선물로 만든 땡모반 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해봅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우리!
22년 6월 9일 이야기.
사진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