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멋졌다
비가 오면 어쩌나 걱정하던 결혼식 주인공들의 염려와 달리
그 전날 종일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해가 쨍쨍한 밝은 날이다.
오랜 친구, 그리고 그보다는 짧지만 긴 시간 연인이다 드디어 부부가 된 그들을 축하해주고
집으로 돌아와 잠시 쉬다 보니 어느새 약속 시간.
점심때 입고 간, 평소에는 입지 않아 어색한 긴치마 대신 편한 면바지로 갈아입고선 가방을 챙긴다.
설레는 날이다.
점심때는 그리 덥지 않았는데, 지금은 창문 밖을 보니 날이 밝다 못해 더워 보인다.
걸어가려 하던 계획을 수정하고 대신 지하철을 탄다.
주말 저녁 이 시간, 바글바글한 이곳은 젊음이 가득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대학가 지하철역.
일찍 도착한 지라 역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주변을 관찰한다.
역시나 학생들이 많은지 다들 어려 보인다. 또 신나 보인다.
어디든 학생일 때가 좋구나 새삼스레 느낀다.
출구 앞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며 조금 기다리니 얼마 전 귀국한 친구가 다가온다.
작년에 보고 오랜만에 보니 더욱 반갑다.
우리는 이 더운 날에 맞서기 위해 시원한 냉우동이 맛있다는 집으로 찾아간다.
식당 위치는 생각 안 하고 메뉴만 보고 정한지라 더운 땡볕에 생각보다 오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문을 열자마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와 벌써 식당이 마음에 든다. 합격!
우리는 냉우동을 먹으며 그동안 지내온 날들을 나눈다.
친구는 그곳에 더 남아있을까 했지만, 부모님도 돌아오길 원하시고 해서
일단은 한국에 있기로 하고 들어왔다 한다.
와서 지난 두 달 푹 쉬고 충전하며 이것저것 재미로 해보았는데,
얼마 전 어쩌다 그리게 된 캐릭터들 저작권 등록을 마쳤다고 한다.
다가올 일 년 동안 계속 그림을 그리며, 캐릭터들을 만들며, 이것저것 재미로 해보겠다는 친구가
그때나 지금이나 참 멋지다.
평소라면 우동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남은 수다를 나눴겠지만,
오늘은 같이 가기로 한 다른 계획이 있어 서둘러 우동집을 나온다.
지도를 켜고 목적지를 검색하니 아차, 우리가 걸어온 길 완전히 반대편이다.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거기서 역까지 한참, 또 역을 지나 한참.
나의 얕은 지리 지식으로 홍대라 하여 다 같은 대학가일 줄 알았더니,
가는 길 점점 나무도 많고 한적한 동네로 변하기 시작한다.
혼자 갔으면 절대 못 찾았을 법한 곳에 숨어 있었지만, 친구랑 갔기에 덕분에 시간에 맞춰 서점에 도착한다.
“여긴가?”
사진으로 미리 몇 번이나 봤지만 정말 여긴가 신기하다.
작고 아담한 공간, 서점보다는 작업실 느낌에 가깝다.
중앙에는 나무로 된 따뜻해 보이는 긴 테이블, 그 위에는 케이크와 빵, 음료가 세팅되어 있고,
왼쪽에는 사진으로 봤던 유럽에서 건너온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오른쪽 벽을 가득 채운 책들. 그중에는 내가 참 좋아하는, 익숙한 책들도 더러 있다.
떠오르는 기억에 미소가 조금씩 번진다.
마음이 너무 아프던 시절, 똑똑 손으로 두드려보면 속은 텅 비어있는 나무 가구 같던 시절.
주말에 시간이 나면 광화문 서점에 가서 책과 사람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냈다.
평소에는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를 전시해 놓은 코너에 잘 가지 않는데,
그날따라 우연히 지나가다 보게 된 책이 있었다.
그리고 제목을 보고 궁금하여 한 장 한 장 넘기다 이내 그날, 그곳에서 겨우 붙잡고 있던 마음이 무너졌다.
공항에서 혼자 펑펑 울다 온 이후로 두 번째로 혼자 책장에 기댄 채 책을 들고 울었던 거 같다.
그래도 공항은 이별의 장소인 만큼 눈물을 흘릴 명색이라도 있지, 서점에서 궁상맞게 울다니, 하며
손으로 슥슥 닦고는 책 제목과 작가를 마음에 새겼었다.
“저녁 드시고 오셨어요?”
맞은편에 두 분이 이미 도착해 앉아 계셨고, 이곳이 익숙한 듯 슉슉 지나다니시는 분이 작가님이구나 싶다.
작가님 인스타그램을 열렬히 팔로우 하는지라 머릿속에 생각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사실 조금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있으실 것 같다는 나의 예상과는 빗나가게
동그랗게 큰 눈과 편안한 목소리를 가지신 분이시다.
다들 쑥스러운지 은은하게 켜진 스탠드 사이로 얼굴을 숨기고는 대답을 못 하고 있어
괜스레 나서서 유럽 잘 다녀오셨냐고 한마디 던져본다.
이제까지 강의하신 날들 중에 가장 적은 인원이 신청했다고 하신다.
원래는 네 명이었는데 마지막에 두 분이 추가돼서 총 여섯 명.
공지가 뜰 때마다 갈까 망설였지만, 사람이 많은 것보다 적은 걸 좋아하기에 오늘 오기를 참 잘했다 싶다.
중앙에 이름이 적힌 작은 팻말들이 있는데, 자기가 볼 수 있게 앞에 놓아달라고 하신다.
이름을 공유하니 왠지 벌써 친근한 느낌이다.
나머지 두 분이 도착하시고 강의는 시작된다.
강의라고 하기엔 강의라는 단어에 너무 딱딱하고 지루한 느낌이 있는 것 같아
강의보다는 뭐랄까, 소모임이 더 맞는 듯 같다.
원목 테이블이며, 은은한 조명이며, 중간에 놓인 다과와 7명이란 딱 좋은 숫자.
그렇게 기다리고 고대하던 대화가 시작된다.
라디오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긴 세월 라디오 작가의 명장답게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들려주시며
만약 아무나 섭외할 수 있다면, 누구를 DJ로 섭외하고 싶냐는 질문을 하신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딱히 새로운 대답을 내놓지는 못하지만,
내 순서가 지나 생각해보니 DJ로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참 많다.
유재석, 윤종신, 김미경, 박지선, 이지형, 커피소년, 윤시윤, 윤대현 교수님 등
생각해보니다 가지각색 이유로 DJ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참 많다.
이야기는 계속 흘러간다.
라디오 얘기, 책 얘기, 이런저런 경험들, 조언들, 그리고 사랑 얘기, 사람 얘기...
한 친구분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 친구분은 연애하다 자연스럽게 남자친구와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셨단다.
근데 결혼 준비를 하며 보니, 과연 이 사람을 결혼할 만큼 좋아하는지 뒤늦게 마음의 확신이 안 서서
아무래도 이대로 결혼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셨단다.
그리고 남자분은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는 동안 자기랑도 연애를 할 수는 없으니 그럼 헤어지고,
대신 일 년을 기다려주겠다고 하셨단다. 일 년.
나라면 화가 나고 속이 상해서 기다리게 되더라도 기다린다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
일 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겠다고 한 남자분이 참 대단하다 싶다.
근데 그 둘에게 드라마 같은 일은 그때부터 일어났다.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여자분의 한쪽 얼굴과 목에 유리 조각이 다 박힐 만큼 꽤 큰 사고가 난 것이다.
남자분은 최대한 침착하게, 듬직하게 상황을 수습하고선 둘은 도착한 구급차에 탔고,
한 번 더 괜찮냐고 묻고는 여자분이 괜찮다고 답하시는 걸 듣고
손을 꼭 잡은 채, 그렇게 긴장이 풀려서 코를 골고 잠이 드셨단다.
그 순간 그 모습이 너무 웃겨 웃음이 났는데, 그때 아, 이 사람하고 결혼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어서
그렇게 둘은 병원에서 한 달 동안 진하게 연애를 하고 결국 결혼을 하셨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신기하다. 또 사람 인연이라는 게, 그렇게 신비롭다.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어쩌면 마음대로 하지 못해서
더 마음 아프고, 마음 설레고,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20대 때는 걱정하지 말고 많이 만나보라고, 그래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작가님을 보며
왠지 나를 보고 하시는 말씀 같아 마음을 다 들켰나 얼굴이 조금 발그레 진다.
“20대 때는 걱정 말고 만나봐요, 그래도 돼요.”
나의 끝나지 않은, 또 시작을 못 한 인연들을 되돌아보다 괜히 마음이 찡하기도 하고, 조금 쓰리기도 하다.
옛사람의 그늘에서 헤어 나오질 못해서 그대로 머물러 있는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래도 제일 힘들 때 글을 통해 많이 공감하고 위로받은 사람에게서 오는 조언이라 그런지
마음의 울림이 조금 더 깊다. 그렇게 마음에 새긴다.
마지막으로 내가 글 쓰는 것에 대해 궁금하다고 앞서 말씀드린 터라, 글 쓰는 이야기로 마무리하신다.
작가님이 알려주신 팁은 묘사의 중요성이다.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가 알아듣게, 상대의 마음속에 그림을 그려주듯이 써라.
또한, 디테일을 살려 쓰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매일 쓰는 것이라 그러셨다.
지치지 않고 계속하는 지구력,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음을.
요즘따라 더 그 부족함과 또 그 중요성을 느꼈는데, 딱 그 마음을 콕 짚어주셨다.
그렇게 매일 쓰며, 나만 쓸 수 있는 걸, 나만의 문체를 점점 갈고 닦게 되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 길을 터줄 것이라며.
원래 예정돼있던 2시간, 그리고 Q&A 1시간을 넘게 꽉 채울 만큼
많이 웃기도 웃고, 마음이 찡하기도 찡했다.
거기서 나눈 많은 대화를 여기에 담으면 끝이 없겠지만,
종종 열리는 강의니 참석하셔서 작가님과 만나기를 추천해드린다.
작가님,
그때 하셨던 질문이요. 아무나 섭외할 수 있으면 누구를 DJ로 섭외하고 싶냐는.
있죠, 지금 생각해보면 섭외하고 싶은 사람은 정말 많은데,
그냥 DJ가 누구든 작가님이 원고 써주시면 다 상관없을 것 같아요. 정말로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픈 마음 누군가 토닥여주는 것 같아 정말 많은 위로가 되었어요. 그 날 광화문에서.
그래서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광화문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언젠간 책 들고 갈게요.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서울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3. 그녀는 멋졌다.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