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멋졌다
글쎄,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
정확히 기억이 안 날 만큼 오래전이야, 그렇게 설명한다면 될까?
초등학생 때 만난 우리가 어느새 사회에 나온 지도 어느 정도 된 시점을 지나고 있으니
정확히 몇 년도였는지, 우리가 몇 학년 때 처음 만난 것인지 콕 짚어 말을 못 하겠다. 너는 기억하려나?
“2009년이었나… 기억이 안 나.
너무 오래전이었잖아.”
“아니, 우리 썸머셋 살던 시절 말이야. 기억나?”
썸머셋, 그 이름도 입에 올린 지 벌써 세월이 한참.
초등학교 시절 내내 살았던 아파트였는데, 그 이름에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네.
덥고 또 덥던 동남아에서 보낸 시절이 어언 10년이니
처음 도착했던 ’99년에 비해서 떠나던 ’11년에는 세련된 신식 아파트들이 많이 생겼다만
처음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했을 때에는 선택권이 거의 없었잖아.
일단 그 정도면 꽤 큰 아파트 단지였지.
3개의 건물이 있었고, 중간에 햄피자가 맛있던 작은 야외식당과 수영장,
또 그 옆으로 꽤 컸던 놀이터, 그 옆에는 실내 놀이방, 그 옆에는 작은 슈퍼.
그 여러 가지들이 동남아스러운 조화로움에 잘 섞인, 그 자체로 하나의 마을이자 동네 같은 단지였는데.
한창 뛰놀던 시절, 특히 술래잡기와 숨바꼭질을 즐기던 내게는
그 큰 울타리 안에서 모든 곳을 누빌 수 있던 널찍한 공간과 그 공간이 주던 자유로움이 좋았거든.
물론, 그 자유로움이 좋았던 건 그 자유로움을 같이 누빌 수 있었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때는 아파트가 몇 채 없던 시절이니까 이 동네, 저 동네 다양하게 선택을 할 수 없었고
고로 우리 같은 이방인들은 몇몇 공간에 집중적으로 몰리게 되었는데
어린 나이에 타지 생활을 시작한 내게는 같은 동네에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는 게 반가웠거든.
“그때 썸머셋 시절 말이야.
맨 처음, 네가 맨 처음에 왔던 게 몇 년도였지?
처음 이민을 간 해에는 한국에서 온 또래 친구가 한 명뿐이었어. 그것도 남자아이.
그래서 더 외로웠었지. 학교에서는 말도 안 통하고 생긴 것도 다 다른데,
그나마 그 30명, 40명 중에서 말이 통하던 친구는 하나였으니까.
그것도 서로 별명이나 불러가며 수수깡이니, 새우깡이니 그렇게 유치하게 어색함을 표현하고.
그때는 학원이나 과외나 그런 것들로 인해 머리가 복잡하지 않던 시절이니
둘이서 하는 숨바꼭질이 아니라 좀 여럿이서 하는 박진감 넘치는 숨바꼭질이었으면 좋겠다 싶었었어.
그러던 와중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낯설던 타지 생활이 덜 낯설어질 즈음
우리 동네로 위로 3살, 4살 많던 언니들이 이사 왔지.
그때 드디어 여자 동지가 생겼다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어.
내가 무려 3살, 4살 더 어렸지만, 언니들은 나를 자기들의 무리에 끼워주었고
그렇게 어울려 드디어 박진감 넘치는 술래잡기와 숨바꼭질을 하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게 된 거야.
너는 같이 나와서 뛰어놀지 않았어. 고로 한동네에 살면서도 자주 봤던 거 같지는 않다.
그저 그 무리 중에서 같이 교환일기도 쓰고, 공기도 하며
특별히 친하게 지내던 너의 누나를 따라 너희 집에 갈 때면 마주치는 정도?
내 기억 속의 너는 항상 뚱한 표정으로 마루 컴퓨터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었고,
우리는 별다른 인사 없이 그저 눈으로 ‘또 왔구먼,’ ‘오늘도 저기 앉아있구먼’ 정도의 안부를 건네던 정도?
그 당시 너는 너의 누나처럼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어.
게다 그때 너는 오빠이기까지 했으니, 그저 눈싸움을 한 3초간 진행한 후에
너의 누나를 따라 방에 들어가고는 했지.
그래도 열 번에 한 번 정도는 너희 집에 들러 너에게 말을 거는 날들이 있었는데, 기억하지?
언니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뚱해 보이는 표정으로 의자를 살짝 돌려 나를 쳐다보던 네게 다가가
“이거 좀 깨줄 수 있어?” 혹은 “이거 좀 깨줘”라고 말하고는 했잖아.
우리가 어렸을 적 최고로 인기 좋았던 게 ‘다마고치’가 한물가고 ‘펌프’ 또는 ‘DDR’이 동남아 땅을 밟기 전
‘게임보이’였잖아. 게임보이로 하던 포켓몬.
그래서 여름방학마다 문방구에 꼭 들러서 거금을 지급하며 포켓몬 카드를 모으기도 했고.
아무튼, 1학년 때 처키를 본 이후로 바비나 인형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고
티셔츠 소매에 레이스 하나만 달려있어도 절대 안 입는다 떼쓰던 나였으니
게임보이만큼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놀이는 없었어.
웬만해서는 별문제 없이 팩을 번갈아가며 잘 깼는데,
그러다 한 번씩 화면이 새까매진 상태로 동굴을 헤쳐 나가야 할 때면 속수무책이 되었어.
언니들 중에 게임보이 팬은 없었기에, 그때마다 너의 집에 놀러 갈 때면
너의 무서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다가가 “이것 좀 깨줘”라며 내 소중한 노란색 게임보이를 건네고는 했지.
그러면 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무섭게 한 번 노려보, 아니 쳐다보고는
너에게 내민 내 손 안의 게임보이를 가져가고선
언니랑 신나게 놀다가 저녁 먹기 위해 집에 갈 때 즈음 방에서 다시 나오면
아무 말 없이 밝아진 화면의 게임보이를 돌려주고는 했는데.
그래, 그 시절의 너는 유일하게 동굴을 뚫어줄 수 있는 나의 희망이자 게임보이의 신이었지.
“3학년일걸? 나 3G였으니까.
3학년부터 다녔던 거 같은데.”
네가 3학년이었다면 내가 2학년이었을 때구나.
말이 된다. 처음 이사하였던 1학년의 시절에는 네가 없었으니.
그러면 우리가 2000년 즈음에 처음 만났다는 건데… 그래, 그즈음이 맞는 거 같다.
무섭게 생긴 만큼 무서운 실력을 자랑하던 게임보이의 신을 만났던 게.
주 중에 다니던 학교에서도 네가 한 학년 더 높았고,
주말에 다니던 한국학교 (혹은 한글학교, 또는 주말학교) 에서도 네가 한 학년 더 높았으니
너는 더욱이 다가가기 어려운 오빠였지.
난 생일이 빠르면 한국 시스템에서는 한 학년 일찍 들어간다는 이유로
주말학교에서는 네 또래 친구들과 같은 반으로 배정받았었는데,
이상하게 너는 주말학교에서도 나보다 한 학년 위였어.
“네가 생일이 빠른가?
왜 주말학교에서도 네가 한 학년 더 높았지?”
너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보내 놓고 다시 그 시절을 회상해보니
아무튼 너는 어려웠던 존재로 정의해야 가장 정확한 듯하다.
네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던 해까지 3년, 4년, 이건 더더욱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동안 우리가 나눈 단어의 수를 세어보라면 세어볼 수 있을 정도로 몇 마디 되지 않았던 거로 기억해.
그나마 나는 너에게 “이것 좀 깨줘”라고 세 마디를 던지기라도 했지,
너는 아무 말 없이 건네받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돌려주었잖아.
그러고 또 세월이 흘러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나는 잠시 익숙해져 버린 동남아를 떠나 미국에서 몇 년을 보내었고,
가족과 마지막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 전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 즈음
네가 사복을 입고 (즉, 전학생의 신분으로) 학교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어.
아버지가 다시 호찌민으로 발령을 받으셔서
나보다 한 학기쯤 먼저 학교로 돌아왔다는 거였지.
“오늘 같이 피자헛에서 밥 먹었어!
오빠 완전 달라졌어! 몰라볼걸?!”
초등학생 시절 함께했던 썸머셋 친구들 중에 남은 건 우리 집과 한두 집 정도밖에 없었으니
반가움에 우리 가족과 너희 가족이 다시 만났을 때는 정말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고 또 흔치 않던 프랜차이즈라 이슈가 되었던 피자헛에서 만난 너는
내 동생이 느낌표를 잔뜩 실어 소식을 전해올 만큼 모습이 변해있었다 했어.
통통하던 무표정의 너는 온데간데없고, 독하게 살을 쫙 빼서 몰라볼 정도가 되어 돌아왔다 했지.
근데 무엇보다, 네가 돌아오며 한 학년을 낮추기로 한 바람에
내 친구들이 있던 반으로 전학 오게 되었다고 했어.
그때부터 어찌나 친숙하게 느껴지던지.
동생이 보낸 사진 속에 너는 이전의 무섭던 아우라를 뿜어내던 너와 달리
순둥순둥해 보이는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나도 그다음 학기에 합류하기로 되어있었으니 더욱 반가웠어.
학년이 바뀌며 새로운 친구들과 지내려니 어색해한다는 말에
꾸준히 연락하고 지내던 친구들에게 전학생한테 잘해주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로부터 몇 개월 후, 한 6년, 7년 만에 너를 다시 만나게 되었지.
너는 정말 사진대로 키도 크고 살도 많이 빠졌지만,
무엇보다 정말 순둥순둥한 미소로 친한 척을 했어.
심지어 우리는 같은 홈룸으로 배정받았고, 고2와 고3은 그 반 그대로 유지되었으니
사물함도 근처인 것은 물론, 아침마다 출석을 위해 같은 교실에 모였고
점심때면 누가 정할 것도 없이 하나둘 어슬렁어슬렁 늘 앉던 식당 가운데 테이블에서 모였지.
너를 다시 만나게 된 첫 주에, 이제 같은 학년에 같은 반인데 오빠는 아니지 않냐는 나의 말에,
말을 놔도 좋다, 다만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야’라고 할 수 있으면 친구를 하겠다는 너의 말에,
한치의, 정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야”
라고 했는데.
3학년의 너였다면 절대 그러지 못했을 거 같은데, 다시 돌아온 너는
정말 덩치만 컸을 뿐이지 또래 아이들보다 착하고 순수한 것이 투명한 유리에 비치듯 보였거든.
더는 한 개도 무섭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렇게 너와 다시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어.
때로는 사람 인연이 참 신기하지.
그때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혹여 한국이든 어디든 다시 마주치게 되었더라 해도
순하게 변한 네 모습에도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요?!” 외에는 몇 마디 못 붙였을 텐데,
전학생 분위기 폴폴 풍기던 너는 내가 돌아옴으로써 아는 사람을 하나 업고 금방 적응을 했고
나도 게임보이의 신이던 그 시절은 잊고 친구가 돼버린 너와 티격태격하며 잘 지냈었던 거 같다.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졸업하고 나서도
나는 애들 중에서 네가 가장 착하고 순수하다 생각했어.
맨날 까불고 원숭이 흉내를 내던 모습 뒤에는, 너는 나이가 들어서도 정말 착하고 순수했으니까.
다른 친구들과는 오랜만에 만나면 서로 너무 변해버린 모습에 다시 만나는 게 언젠가부터 어색해졌는데,
유일하게 너는 반년 만에 보든, 일 년 만에 보든 정말 어제 본 것처럼 편한 친구로 남았지.
게다 너는 대학을 우리 외가가 있는 동네 근처로 갔으니
방학을 맞아 한국에 돌아오면 “학교 끝나고 보자”라는 말에 즉석에서도 만날 수 있는 친구였고.
대학교 3학년을 올라가기 전이었나.
그해에도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에 나왔는데, 학교 끝나고 네가 우리 동네로 오기로 하고선
맥도날드에서 감히 오빠를 기다리게 하냐는 문자에 헐레벌떡 뛰어가 보니
초등학교 3학년 시절 그 뚱하던 표정 그대로 햄버거를 오이 씹어먹듯 와그작 와그작 먹으며
열심히 문을 째려보던 네가 있었고,
너는 끝까지 그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였으나 이미
“반갑다 반가워!” “잘 지냈어?!” “땡땡이친 건 아니지?!”“나가자”는 나의 쉴 새 없는 수다에
이내 등교를 하고 매일 같은 홈룸 안에서 8시 종 치기를 기다리던 모습으로 돌아왔지.
내가 여름마다 잠깐잠깐 이어가던 만남 중에서, 그 날을 유난히도 또렷이 기억하는 건
칼로리 폭탄이던 음료를 마시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대화를 나누다가
네가 평소와는 달리 되게 무거워 보이던 마음을 건넸기 때문이야.
기사에서 자주 본 ‘복잡한 심경으로’라는 표현이 이런 말이구나 처음 느낀 거 같아.
학교, 진로, 길, 꿈, 행복, 무언가 여러 가지로 인해 너는 마음이 복잡한 상태였고,
그 짧은 시간 안에 한국에서의 지난 세월을 네가 다 담아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때 네가 나한테 했던 말 중 문장 하나가 마음에 박혀서
내 기억 속에 되게 선명하게 남겨졌어.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어깨를 툭툭 치며 “야, 웃어! 누나를 보니 반갑지도 않으냐?!”라고 말하던
너와 나의 모습은 사라졌지.
그래도 나는 참 고마웠다.
네가 나에게 가볍고 즐거운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그런 마음도 나누어주었다는 게.
때로는 사람 인연이 참 신기하지.
오히려 고등학교 시절 더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져 버렸는데
만났다, 헤어졌다, 다시 만난 너와는 연락이 이어졌어.
그래서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해 한국에 돌아와서도 너와는 시간을 내서 가끔 만나고는 했어.
덕분에 등갈비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하고, 예쁜 후배 소개해줄 괜찮은 친구 없냐는 말에
두 손 번쩍 들어 너를 강력히 추천하기도 하고.
아무튼, 낯설던 한국에서도 고등학교 시절 그대로 돌아갈 수 있는 네가 있어
한국이 조금 덜 외롭고는 했었어.
“너 합정이지?”
이런저런 변화들을 겪으며 거의 모든 연락을 접고 지낸 지 시간이 좀 흐른 후.
어쩌다 보니 너와도 만난 지는 일 년 즈음이 되어버렸더구나.
딱 일 년 전쯤 치킨집에서 만나 엉망이던 꼴을 보여주고는
그 후로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이유하에 너와도 별다른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았는데
뜬금없이 10시가 다 되어가던 시각에 네 전화가 왔더라지.
“왜?!”
“나와.”
너는 약속이 있어 우리 동네에 왔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집이면 내려오라 그랬어.
“근데 나 지금 너무… 아닌데?”
그날은 내가 집에서 작업을 한 날이라, 그날도 상태가 영 아니었거든.
근데 언제 우리가 그런 거 따졌냐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서,
그래, 네 말이 맞다 하고서는 츄리닝 차림에 앞머리도 넘긴 채로 나갔다지.
역시나 너는 보자마자 웃음이 나게 지하철 입구에서 온갖 폼을 다 잡고 서 있더니
“잠깐 뭐 한 30분 얘기하다 가지”라 한 게 한 시간 반을 훌쩍 넘겨버렸어.
“넌 언제 가지?”
“내년에 졸업하고 바로.”
“그럼 언제 나와?”
“2년 있다가.”
한국에 오고 제일 낯설었던 것 중 하나가 군대라는 개념이었는데,
ROTC 55기, 너는 내년이면 장교로 떠난다 했어.
회사를 관둔 후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거냐는 질문을 쏟아냈기에
무의식적으로 ‘아, 그래도 다음 2년 동안은 어디에 속해 있을지 정해져 있어 걱정이 없겠구나’하고 있는데
너는 그보다 더 멋진 너의 계획을 나누더라.
장교로 지내는 동안 월급이 나오니 그걸 모아 제대하고 나서 일 년 동안 세계여행을 떠날 거라고.
그러면 20대 후반이 끝나갈 즈음 다시 돌아올 거라고, 이곳으로.
“그러고 나서는?”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어.
당장 그다음 2년에다 추가로 1년, 총 3년의 계획을 세운 너에게
어찌 될지 모르는 게 사람 인생인 만큼 4년 후, 5년 후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는데
순간 되게 궁금했거든, 확신에 찬 네가 부럽기도 했고.
“글쎄, 제주도에 가서 살려나?”
“취업은?”
“안 할 거야. 회사에 다니고 싶진 않아.”
우와했던 거 같다.
물론, 그때 가면 생각이, 또 계획이 바뀔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마치 순리대로 졸업하고 취업하는 게 정해져 있는 길이라 생각했는데,
그리고 내가 겪어본 한국 사회에는 그러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부담과 압박을 많이 쥐어주던데,
근데 남들이 하기에 나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린 네가 참 멋진 거야.
네가 ‘회사에 다니고 싶진 않아’라고 말한 데에는
단순히 싫다거나, 귀찮다거나, 적성에 안 맞는다거나, 그런 답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으니까.
무슨 말이냐면 –
“내년에 들어가서는 특전사로 가려고.”
“특전사? 특전사는 뭐지?”
“유대위 있잖아, 태양의 후예.”
“네가??? 네가 유대위를 한다고???”
“유대위가 나를 모티브로 만든 거란 걸 모르고 있었나?”
(한 대 때리고선)
“근데 왜? 군대에 남으려고?”
“아니.”
“그럼? 돈이 더 나오나? 아니면 특별한 경력으로 쳐주나?”
“아니.”
“근데 왜? 너무 고생만 하는 거 아니야?”
“하고 싶어서. 내가 하고 싶으니까.
난 하고 싶은 걸 하고 싶거든.”
순간, 네 답이 내 질문을 참 부끄럽게 만들었거든.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있어야 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넌지시 비추던 내게
너는 가서 하고 싶은 걸 의미 있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해보고 싶단 거였거든.
내가 말한 돈이나, 경력이나, 사회에 돌아와서 도움될 거 하나 없이
오히려 몸만, 건강만 상하고 올지라도
너는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은 일로 만들겠다던 거였으니까.
“하고 싶어서.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맞아. 네 말이 맞다.
금이나 은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니까
그래서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시간이 갈수록 한 편으로는 그 마음이 더욱 단단해지는가 하다가도
또 한 편으로는 점점 그 뿌리가 흔들리는 거 같아 생각이 복잡했거든.
근데 네 말이 맞아.
하고 싶어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데
그걸로 충분한 거잖아.
나도 대학생이던 시절에 네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싶어서.
내가 하고 싶어서.
포켓몬을 하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컴컴한 동굴에 들어가게 될 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어둠을 뚫고 다시 그 반대편으로 나와야 했잖아.
나는 매번 동굴에 들어가 몇 분 헤매다가 또다시 입구로 나와버리고,
들어가서 헤매다가 또다시 입구로 나와버리고,
그렇게 제자리걸음만 했었거든.
근데 그럴 때마다 너한테 맡기면
너는 어떻게든 그 어둠을 뚫고 그 동굴 밖으로 나왔어.
그래서 신나게 하다가 또 어두운 동굴을 마주치게 되어도
너한테 도와 달라 하면 되니까 더는 걱정이 되지 않았어.
있지, 지금 나는
그때보다 훨씬 넓고, 훨씬 어둡고, 훨씬 막막한 동굴 속에 있는데
네가 옆에서 기준을 잘 잡아주고
내가 흔들릴 때마다 다시 세워줘서
제자리걸음을 하다가도, 또 열심히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그때처럼 이 동굴을 헤매는 친구를 도와줄 거지?
서울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13. 그는 멋졌다.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