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멋졌다
“비와? 아직도? 설마.”
주일 저녁 셀 모임이 끝나고 다음 약속으로 향하기 위해 가방을 챙기는데
점심부터 내리던 비가, 우산을 안 들고 왔기에 저녁 전에는 그쳤으면 했던 비가
아직도 오고 있단다.
“걸어가야 하는데 이런.”
어느새 가을도 한참 접어든지라 이 시간에도 벌써 밖이 어두워져 버려
비가 내리는지 안 내리는지 직접 나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다행히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니 가볍게 내리는 정도라 맞아도 괜찮을듯하다.
‘나 지금 끝났어 바로 갈게. 어디야?’
거의 일 년 만에 보는 친구 하나와 두세 달 만에 보는 친구 하나.
그렇게 셋이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서는 걸어가는 길. 바람이 정말 많이 차가워졌다.
3번 출구 쪽이라 하여 지하도로를 건너 계단 위를 올라가니 곧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두 친구가 보인다.
두세 달 전에 본 친구는 그 모습 그대로인데, 일 년 만에 보는 친구는 반가운 마음에 그만
“살쪘네! 살쪘어!”
연애하면 다들 얼굴이 좋아지고 살이 찐다더니 그렇다, 그런가 보다.
정말 표정도 훨씬 밝아지고 둘에게서 후광이 비춘 달까나. 역시 사랑이 좋은가 보다.
지난번에 친구랑 같이 갔던 맛집을 찾아 올라가 주문을 하고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들으니 이런저런 변화들이 있었다.
한 친구는 얼마 전에 취직을 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한창 바빠졌고,
한 친구는 장교시험을 준비하느라 여름부터 정신이 없었다 한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페이퍼가 몇 개라느니, 미드텀이 끝이 나질 않는다느니,
사역 얘기 캠퍼스 얘기 그런 학부 시절의 얘기들로 대화를 수놓았던 거 같은데,
이제는 벌써 대화 주제가 옮겨와도 한참을 옮겨왔다.
지구 반대편으로 건너와 합류를 하고 각자 새로운 자리에 잘 정착한 것을 보니 괜스레 내가 다 뿌듯하다.
어떻게 지냈는지 나누다 보니 식사시간도 빠르게 지나가고,
다시 찬 바람을 뚫고 자리를 한차례 옮겨 따뜻한 차 한 잔씩과 진열대에 케이크를 쓸어 담아 오니
정말 궁금했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녀와는 1학년 때부터 알아왔고, 그와는 2학년 때 처음 만났는데,
나는 먼저 떠나오고 그 둘은 그 후로 계속 이어져 지금까지 5년이란 시간을 한동네에서 함께 보냈으니
둘이 함께인 것은 자연스러운 전개이지만 그래도 궁금하지 않나.
그와 그녀는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작년인가, 몇 번 만났었어.”
나와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녀는 대범하고 멋진 여자이기에
그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그에게 다가가 마음을 고백하였다 한다.
둘이 함께 해온 시간과 친하게 지내온 과정을 돌아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는데
그다음 단추를 끼우는 것이 조금 어려워져 버렸다.
“근데 얼마 후에 자기는 그런 마음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접게 되었지.”
이즈음에서 작년에 내가 다시 학교를 방문했던 거 같다.
돌아갔을 때 그와 그녀의 사이는 내가 떠나기 전과 같은 여전한 친구 관계였고,
사실 그때만 해도 그 둘 사이에 그러한 이야기가 오갔다는 걸 몰랐다.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근데 그 후에 특별한 사람이 있었잖아?”
작년 가을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가 나에게 나눴던 이야기가 이 부분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왔을 때 그녀에게 마음을 표현한 다른 친구가 나타났고,
내가 그들을 만났을 당시에만 해도 그녀는 그 친구와 잘 돼 가는 듯하였다.
“그러니까. 거기서 여기까지 어떻게 된 거야?”
사람 마음이 참 어렵다, 때로는 내가 내 마음을 정확히 모를 때도 있으니.
내 마음인데, 내 감정인데, 때로는 시간이 흘러 돌아볼 때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는 거 같다.
(혹은 평생 모른 채로 지나가거나).
그도 그랬다 한다. 친구의 감정일 거라 생각하고 넘겼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보니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다 한다.
아니, 너무 힘들었다 한다.
“그러니까 어쩌다 셋이 있게 되면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지는 거야.
다른 친구들이랑 다 같이 있어도, 기분이 안 좋아서 우울해 하는 게 딱 보이더라고.
애들이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무슨 일 있었냐고 가서 물을 만큼.
먹구름을 몰고 다녔어 계속.”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서로가 기억하는 서로에 대한 추억이 달라
혹시 두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건 아닐까 했는데
그녀의 말에 수정 요청이 없는 걸 보아 그도 수긍하는듯싶다.
한걸음 늦어서 처음에는 상처 주고 그다음에는 상처받는 입장이 되어버린 그는
어느새 멀어져 버린 그녀를 보며 어떤 느낌이었을까.
웬만해서는 어느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지 않는 그가 ‘힘들었다’라고 말할 때에는 얼마나 괴로웠던 걸까,
한걸음 늦어버린 마음에.
언제나 한 걸음 늦은 마음이 제일 힘든 법이니. 더군다나 그게 자기 때문이라면.
“그때 그 둘을 보면서 깨달았지. 아, 내가 좋아했던 거구나. 내가 좋아했던 거구나.
내가 좋아했는데, 좋아하는데,
근데 그때 미처 내 마음을 깨닫지 못해서 내가 놓쳐버린 거구나.
내가 놓친 거구나…”
그 새로운 사람이 정말 잘해주었다고 한다.
매일 마음을 표현하고, 자상하게 챙겨주고 또 배려해주고,
정말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끊이지 않을 만큼 정말 잘해주었다고 한다.
이전에 좋아했지만 마음이 같지 않아 멀어져 버린 예전의 사람과,
그저 좋은 동생으로 지내오다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새로운 사람의 사이에서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엉킨 실타래도 없었지만
그 내면에는 어딘가 어려워지고 복잡해지는 미묘한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근데, 상황이 너무 안 좋았어.”
그녀는 졸업을 앞둔 상황. 더 남기로 할지, 다시 돌아가기로 할지 미지수였지만
그 사람은 아직 몇 년 더 남은 상태에서 그곳에 남을 사람.
게다가 맡은 사역과 책임이 있었기에 둘의 마음만 일치한다고 선뜻 시작할 수도 없었던 인연.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하는 여러 가지 고민들 가운데
처음에는 반년만 기다리면 풀릴 줄 알았던 약속이 상황의 변화로 인해 3년으로 늘어났다 한다.
물론, 3년 뒤에 상황이 또 어떻게 바뀌어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미래.
“그 친구가 그리는 미래와 내가 그리는 미래가 너무 달라져 버렸어.”
살아가는 데 있어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게 참 많은 거 같다.
작년에 한 번 깊이 깨닫게 되는 계기가 있었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욱 느끼는 거 같다.
살아가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 마음이겠지만
그만큼 또 그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인 듯하여
우리는 무엇이 이렇게 어렵고, 또 어려운 것일까.
“근데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간 거지.”
졸업이 확정되고 비자가 끝이 나면서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거로 결정이 났고,
그도 똑같이 졸업 후 한국으로 입대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래서 그 둘은 그곳에서 함께 5년, 또 같이 한국으로 귀국하는 계획에 따라
또 한 번 인연이 겹치게 되었다.
“근데 그래도, 나도 웬만해서는 용기를 내고 후회하는 게 낫다에 한 표인데,
나 같으면 그 상황에서 용기를 못 냈을 거 같단 말이야.
근데 너는 잡은 거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같이 대범한 사람들도 쉽게 내지 못했을 용기를
내가 알던 그라면, 그녀가 알던 그라면 그러지 못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한걸음 늦어버려 마음이 쓰라렸을 그는 두 번은 놓치면 안 되겠다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한다.
이렇게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거 같았다 한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한 박자 늦게 깨달은 만큼, 이번만큼은 또 한 번 늦어서는 안 되겠다고.
“그래서 운명이 있는 건가 했어.”
한번 놓쳤지만, 자신의 마음을 진작 깨닫지 못하여 한 번은 보냈지만,
마음이 되게 힘들고 쓰라린 채 그저 ‘예쁘게 잘 만났으면 좋겠다’라는 말밖에 더는 하지 못했던 그에게
기회가 다시 돌아온 것은.
“이번에는 놓치면 안 되겠다.
이번에는 꼭 잡아야겠다.”
그래서 5년의 끝에서야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게 된 그 둘은
어제 다퉜다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앞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다정한 모습인 그들은.
“여기 오기까지 여러 번 돌아가야 했고 또 멈춰야 했지만
그래도 그 무엇 하나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둘도 없었을 수 있겠네.”
“그렇지. 새로운 사람이 다녀가지 않았거나, 내가 미국에 남게 되었거나,
그래서 같이 한국에 돌아오게 되지 않았거나, 그 무엇 하나라도 일어난 대로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다른 결말을 쓰고 있을 수도 있었겠지.”
인연이 항상 그런 거 같다.
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조각이 없다.
이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들어맞았기 때문에
인연이 풀릴 때도 있고, 얽힐 때도 있고, 멀어질 때도 있고, 끊어질 때도 있고.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여러 가지가 모여서 주어진 것들로 최대한 조각을 맞추며 나아갈 때
대충 이름을 갖다 붙여 ‘운명’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예정된 만남으로 모습을 갖춰가는 거라 생각된다.
그렇게 그 모든 조각들이 예정되어있던 순서로 모였을 때야 비로소
오래전부터 예비되어있던 인연들과 마주하게 되니.
“가장 감동받은 게 언제야?”
선뜻 대답하지 못해 생각할 시간을 몇 분 주겠다고 장난치지만
사실 그녀의 대답이 그녀를 참 부럽게 만든다.
“돌아보면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준 것.
항상 내 이야기를 들어준 것.
묵묵히 그 자리에서 그대로, 그렇게 항상 곁에 있어 준 것.”
그는 그러한 사람이다. 학부 시절 함께한 그를 떠올려보면 그는 정말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저 옆에서 들어주면 되는 것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알지 않나,
옆에서 묵묵히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내 삶에 치여, 내가 바쁘니까, 나도 힘든데, 나도 버거운데,
근데 다른 사람의 곁을 지킬 줄 안 다는 건
그러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되지 않고 나 또한 그러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는 걸.
“그게 정말 대단한 건데.
그게 정말 고마운 건데, 그치?”
서로 살아온 배경과 방식이 달라 때로는 이것저것 맞지 않는다 느낄 때도 있겠지만,
사실 처음에는 모든 정성을 쏟아붓다 그 정성이 점차 희미해지느니
나는 처음부터 미지근해도 그 미지근함이 한결같음으로 연결되는 것이 더 좋다 생각하기에.
그래서 그녀 옆에 있는 그와 지금은 비록 이것저것 다툴 일도 생기고, 속상한 일이 생길지라도
그래도 그렇게 곁을 묵묵히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정말
흔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會者定離 去者必返
회자정리 거자필반
즉, 만난 사람은 헤어지게 되고, 떠난 사람은 돌아오게 된다.
그렇다. 사람 인연이 참 그렇다.
곁에 있을 것만 같던 사람은 떠나가고, 이름만 알던 사람은 이름 그 이상의 존재로 다가오고,
끝이 없을 줄 알았던 사람과는 갑작스러운 끝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으며,
끝이라 생각했던 사람은 다시 만나 또 다른 결말을 써내려가게 되고.
時節因緣
시절인연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
즉, 애쓰지 않아도 만나야 할 인연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
그렇다,
사람 인연이 참 그렇다. 그래서 참 알 수 없다.
지나간 인연들을 돌아보며 깨달은 몇 가지를 생각해보면
확실한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만큼 상황이 어렵고 복잡한 것은 어쩌면
그 사람과의 인연이 거기까지라는 걸 뜻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전에 감정이 깊어 있을 때는 상황이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마음만으로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다 믿었는데,
그러기에는 사람 인연이 그보다 더 미묘하고 어려운 것 같다. 요즘에는 그렇다.
한평생 친구로 지내고 싶었던 사람은 어느새 안부조차 물을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리고,
또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해 이름 석 자 나누고 헤어진 사람은
먼 거리에서도 고민을 주고받으며 시답잖은 얘기부터 갈림길에 선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니
그러니 사람 인연이 그 얼마나 신기한가.
그래서 더욱 공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는 걸.
“이번에는 놓치면 안 되겠다,
이번에는 꼭 잡아야겠다 싶었어.”
“그래서 운명이 있는 거 같아.”
어제 다퉜다는데 서로 속상했던 마음을 나누면서도
그래도 잡은 손은 놓지 않아 큰 걱정이 없다.
무엇보다, 그의 옆에 그녀와 그녀의 옆에 그를 보며
때로는 부딪히고 때로는 엇갈린다 하여도
서로에게 서로 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인연은 없는 거 같기에.
이제는
꽃길이든, 가시밭길이든
함께하는 길만
함께 걷기를.
서울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16. 그들은 멋졌다.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