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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은 쉽니다 Apr 07. 2017

있잖아요, 그 스물세 번째

23. 초대교회




있잖아요,


대학생일 때의 이야기예요. 당시 한 선교단체에 소속되어 있었고

일 년에 한 번 있는 행사로 지역 내 몇몇 캠퍼스끼리 모여 체육대회를 했는데

그만 친구 한 명이 부딪혀서 머리를 조금 다쳤어요. 그래도 병원에 가보는 게 낫겠다 판단해서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별다를 거 없이 소독해주고 밴드 붙여준 게 900불 정도 나왔더라고요.


원래도 큰 금액이지만 형편이 넉넉지 않은 친구였기 때문에

갑자기 어디선가 그 큰돈을 마련해 지급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같은 집에 살고 있던 친구가 그러한 사정을 알게 되었고,

그러면 우리 학년 친구들끼리 조금씩 돈을 모아서 힘이 닿는 데까지는 도와주는 게 어떻겠냐 하더라고요.

다들 그러자 하고 그날은 헤어졌어요.


일주일쯤 후 돈을 관리하기로 한 친구를 만날 일이 있어서 용돈 모아둔 걸 건네주었어요.

그러고 일주일 정도 됐으니 조금 모였겠지 해서 어느 정도 모였냐고 물으니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그 후로 아무도 연락이 없었다고.


아무도 연락이 없었다고? 응. 아니 그럼 그때 돈을 모으자고 했던 친구는?

그 친구도 그 후로 아무런 말이 없어. 그럼 그때 그렇게 하자 말만 하고 네가 관리를 맡고

그러고 흐지부지된 거란 말이야? 그런 셈이지…


그때 아, 어렵겠다 싶더라고요. 돈이 많이 모이지 않겠구나 했어요.

우리가 힘을 보태서 조금이라도 도와주자는 말이 말일 때는 쉽지만 학생들이어서 그런지

막상 행동으로는 이어지지 않는구나. 어쩌면 우리도 결국 말만 앞서는구나 싶더라고요.


차라리 그러면 우리 단기선교 모금하는 것처럼 도넛을 팔거나 커피를 팔거나

바자회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만약에 부담돼서 그러는 거면, 그렇게 해서 수익을 내는 게 낫잖아.

근데 다들 바쁜데 언제 누가 계획하고 준비해서 하겠어… 그것도 어려울 거야.

그럼? 그냥 이렇게 다시 없던 일이 되는 거야? 그러게…


관리를 맡기로 한 친구도 돌아가는 상황에 당황스러워하는 거 같더라고요.

그날 대화를 나누며 조금 실망감이 들기도 했어요, 아이디어만 던지고 신경을 쓰지 않는 거 같아서.

차라리 말을 말지, 이러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 않은 것보다 못하지 않나 싶더라고요.


근데 한 달쯤 후 관리를 맡은 친구가 연락이 왔는데 병원비의 반 정도 모아서 건네주었다 하는 거예요!

그때 연락을 받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몰라요. 반이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닌데 반이나 모았다니.

그 후 아무도 챙기지 않아서 그렇게 조용히 잊히겠구나 했는데 반이나 모았다는 거예요.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 하니까 무엇보다 친구 중의 한 명이

아르바이트해서 한 달간 번 돈을 월급날 그대로 들고 왔다 하더라고요. 병원비에 보태달라고.


한 달간 번 돈이라 적지 않은 금액이었어요. 수업이 끝나고 저녁에 자기의 시간을 들여 열심히 번 월급.

그 안에서 월세도 해결하고 식사도 해결하고 혹은 다른 필요한 것이나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쓰는 건데,

그 돈을 그대로 봉투째 들고 갔다는 거예요. 아니 너 이걸 다 주면 너는 어떡하냐고 하니까

괜찮다고, 자기 걱정하지 말고 급한데 쓸 수 있게 보태 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물론 형편이 더 낫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금수저라서 형편이 넉넉해

한 달 월급 정도쯤은 괜찮다며 주는 게 아니었어요.

부모님께 손을 안 벌리고 열심히 살던 친구였는데 자기도 들어갈 곳이 있고 써야 할 곳이 있지만

자기가 쪼개고 쪼개서 생활해야 하더라도 더 필요한 곳에 써달라고 준거였어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구브로에서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사도행전 4:32-37


가진 게 많아서 준 게 아니라, 가진 게 조금이라도 있기에 나눈 거였어요.

그 조금이 필요 없어서도 아니라, 더 급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나 쓸 거 다 쓰고 필요한 거 다 챙기고 남는 걸 준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걸 모두,

더 필요한 손길을 도울 수 있다면.


할 말을 잃었어요.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결국 말뿐이었나 미리 실망했던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어요.

또 설령 먼저 도왔다 하더라도, 필요한 돈은 제외하고 여유 있는 범위로 도운 건데 너무 부끄러운 거예요.

나였더라면 한 달 동안 공부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 쪼개가면서 열심히 번 돈을

그렇게 통째로 갖다 줄 수 있었을까? 나였더라면 내 월세, 내 밥값, 들어가야 하는 곳을 제외하지 않고

다 건넬 수 있었을까? 그 질문에 그러지 못했고 그러지 못했을 거다가 제 솔직한 답이더라고요.


근데 작년에 또 한 번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어요.

다른 친구가 마지막 학기에 교환학생을 갔다가 돌아온 후 졸업은 했는데 살 집이 없었대요.

부모님도 경제적으로 어려우셔서 각자 생활을 하고 있었던지라 돌아갈 집도 없고,

당장 학교 근처에 방을 찾아서 월세를 낼 형편이 안 되었었대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던 가운데 그때 자기 한 달 월급을 통째로 들고 온 친구랑 연락이 되었는데

자기 원룸에서 같이 지내자며,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편하게 있으라 했다더라고요.

그래서 회사에 취직하기 전까지 몇 달간 빠듯하게 생활할 때 친구가 월세는 절대 받지 않겠다 해서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하더라고요. 덕분에 밤마다 누울 자리가 있었다고.

그 친구 아니었으면 정말 막막했을 거라고.


나 혼자 살던 좁은 집에 선뜻 문을 활짝 열고 공간을 나눠 쓰며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지내라고.

집이 넓어서, 방이 남아서, 마침 심심했는데 부른 게 아니라,

좁은 공간이 더 좁아지고, 혼자 쓰던 공간에 불편해지더라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달이 넘을 수도 있는 시간을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친구를 초청한.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레위기 25:35-37


이전 전적으로 도운 적이 있으니 대단한 걸 알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대단하다 싶더라고요.

근데 그뿐이 아닌 거예요. 생활 속에서도 늘 남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걸 퍼주더라고요.

그 친구의 경제관은 나와 너무 다른 거예요. 나는 적더라도 통장 잔액에 무언가 있어야 마음이 편한데,

이 친구는 매달 잔액이 0이 되어도 남아있는 동전 하나라도 끌어서 필요한 곳에 나누더라고요.

남아있는 한 푼을 나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더 필요한 사람에게, 혹은 마음이 가는 곳에

나눌 수 있고 섬길 수 있다면 내일은 주님이 책임지시겠지 하고 오늘은 손이 닿는 데까지,

정말 문자 그대로 힘이 닿는 데까지 베푸는 거예요. 아무런 계산 없이 있는 그대로.   


진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한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진정으로 나누고 베푸는 것이 즐거운.

성경은 이렇게 살아가라고 도전하지만 세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진정한 제자다운 삶. 이 땅의 물질에 메이지 않고 내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않고 나누는 삶.


우리는 상대적으나 객관적으로나 그 어느 시기보다 부유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흙수저, N포세대 같은 수식어를 쓰잖아요.

물론 그 어느 때나 잘 사는 사람이 있으면 못사는 사람도 있어서 다 넉넉하게 산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전쟁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세대도 아닌데 우리는 늘 힘들고, 어렵고, 고달프다 하잖아요.

그래서 청년들이 살기에 너무 막막해진 시대이자 나라라 하잖아요.


그런데 그건 우리가 선택한 기준이지 꼭 필요한 조건이 아니더라고요.

가진 것이 넉넉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하기에 가진 것이 적든 많든 넉넉한 것.

그래서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나누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진 게 손바닥만 할지라도 나누는 것. 그리고 나누기에 더 풍성해지는 것.

그건 무언갈 바라고 나누거나 이익을 계산해서 나누는 게 아니라,

진정 위하는 마음으로 나눴기에 마음이 든든한 것.

100을 가지고도 1밖에 없는 것 같다 낙심할 수 있지만, 1을 가지고도 100을 가진 듯이 감사할 수도 있는 것.

결국 우리가 선택해나가는 삶이자 만들어나가는 삶이더라고요.


현시대의 이 나라의 청년들을 둘러싼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아요.

저 또한 이 시대에서 이 땅에서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청년인걸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꿈꾸는 세대라 부르지만, 마냥 꿈을 꿀 수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는 것도.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것도.


근데 우리, 예수 믿는 청년은 달라야 하니까요.

우리는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야 하니까요. 우리는 기준이 달라야 하니까요.  

우리는 우리의 중심에, 또 모든 것의 본질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 어디든, 그 언제든, 그 어떠함에서도 늘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하니까요.


어쩌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하는 것도 맞지만

더 빨리, 더 많이가 아니라 무엇이 정령 중요한지 우선순위가 달랐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필요한지도.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행전 2:42


있잖아요, 그 스물세 번째

23. 초대교회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



맘몬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비결


초대교회에서도 역시 공동체적인 삶을 중요시했다… 한 몸을 이룬 초대교회 교인들은 서로 재물을 나누며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넘어 믿음의 공동체가 한 몸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기를 원하셔서 축복을 부어 주시는 것이다. 더 나아가 믿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축복이 흘려보내 지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율법 전체를 요약하신 두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강조하신 것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혼자 부를 축적하지 않고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명령이다.”


“나중에 돈이 생기면 헌금을 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적게 벌 때부터 하지 않으면 나중에 돈이 생겨도 또 쓸 일이 생긴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눌 수 있어야 나중에 큰 금액이 생겼을 때도 나눌 수 있다. 돈을 흘려보낼 때는 그 돈이 내 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오로지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흘려보내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 돈을 내가 쓴다고 생각하면 생색내게 되고 자기 의가 고개를 쳐든다. 아무리 큰 선행을 해도 자기 의로 하게 되면 그 행위로 미끄러진다. 자기 의는 겸손으로 포장된 교만과도 통한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 모든 죄가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교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김의수 & 데이비드 서, “돈 걱정 없는 크리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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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goo.gl/S8lt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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