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광야와 약속의 땅, 그 사이에서
있잖아요,
얼마 전에 친한 후배가 연락이 왔어요.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이던 동생이 벌써 졸업할 학기가 되었다며 든든한 선배의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시간이 참 빠르게도 지나갔다고 그동안의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데 고민이 많더라고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러니까 일 년 반쯤 전에는 전공에 대한 고민이 깊었었는데
이제는 마지막 학기라는 부담 가운데 졸업 후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었어요.
모든 길이 막힌 것만 같고 모든 문이 닫힌 것만 같다며
졸업 후 그다음 계획이 확정된 것 없어 불안하고 너무 불안하다고.
“너무 막막해 언니. 졸업하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 우선 숨 좀 돌릴까 싶다가도
한 것도 없는데 쉬어도 되는지 모르겠고. 쉰다고 뭐가 해결될지도 모르겠고.”
불안함. 막막함. 초조함.
그 불안함의 시기는 오늘날의 한국을 보면 훨씬 앞당겨진 것 같지만
저 때만 돌아봐도 고등학생 때부터는 지속되었던 거 같더라고요.
고등학생일 때는 성적의 불안, 입시의 불안, 대학생일 때는 학점의 불안, 취업의 불안,
그리고 직장인이 된 후에는 이제는 다 이루었다 싶을 줄 알았는데 더욱 다양한 형태의 불안이 찾아왔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단계별로 닥쳐올 불안 또한 어느 정도 예상되죠.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까, 가정을 건강하게 세울 수 있을까, 자식을 잘 키울 수 있을까,
돈 걱정 안 할 수 있을까, 건강 걱정 안 할 수 있을까, 그런 식으로
시기마다 그 시기의 불안과 또 잠재적으로 깔린 불안이 덮칠 것이라는 건 주위를 둘러보면 알 수 있어요.
일 년 전에 연락했더라면 해줄 말이 없었을 텐데.
지금도 불안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 년 전에는 정말 불안한 시기를 보냈거든요.
그때 연락이 왔더라면 글쎄요, 뭐라고 해줄 수 있었을까요.
저 또한 이렇게 지내도 되는지, 하루씩 살다 보면 무언가 잡히는 게 있을지 모르겠던
슬럼프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 연락했더라면 위로조차 제대로 해주지 못했을 거예요.
근데 2016년 한 해를 보내면서 일 년 동안 조금씩 조금씩 깨닫게 해주신 것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퇴사 직후에 학교로 돌아가서 한 달 정도 캠퍼스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휴식의 기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그리움을 달래고 싶기도 했고,
또 많은 게 엉켜있는 것 같던 당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돌아갔죠.
가서 반가운 사람들도 만나고, 친구들 따라 수업도 들어가고, 그렇게 즐겁게 지내며
무엇보다 그동안 놓쳤었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 여느 때보다 기도에 힘썼습니다.
정말 백지상태였어요. 일단 숨을 돌리기 위해 잠시 멈춰 섰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허허벌판에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요.
광야에서 벗어났다 생각했는데 그건 출애굽의 불과했고
진로, 회사, 나라, 관계, 사람, 상처, 모든 게 뒤죽박죽 엉켜있는 광야 같았어요.
“이제 저는 무얼 해야 할까요?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할까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대답이신지요.
갈 바를 알지 못해서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여쭤봤는데 그와 아무런 상관없어 보이는 질문을 던지시다니요.
그렇다 대답하고 근데 그보다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질문하니
계속 똑같은 답만 주시는 거예요.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냐고.
그렇게 며칠 똑같은 대화의 반복이었어요.
그동안 제 질문은 바뀌었죠. 이렇게 글을 써도 되나요? 무엇에 대해 써야 하나요?
아니면 회사를 알아봐야 하나요? 아예 미국으로 이직해야 하나요? 아니면 한국에 남아야 하나요?
공부를 계속해야 하나요? 관계들은 어떡하죠? 모든 상처가 아물 날이 올까요?
정말 백지상태였기 때문에 제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여쭤봐야 할 것이 너무 많았는데
근데 그 모든 질문에 항상 같은 답을 하시더라고요.
나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 질문에 그렇다 답을 해도 또 한 번, 정말 마음 다해 사랑하냐고.
처음에는 질문의 답을 구하고 있는데 자꾸 다른 질문만 던지셔서 이해가 안 갔어요.
그것도 계속 똑같은 질문을 던지시니 말이에요.
근데 며칠 동안 그 어떤 영역을 놓고 기도해도 같은 답을 주시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 자꾸 이 질문을 하실까. 왜 나의 모든 질문의 답으로 이 질문을 하실까.
내가 본질을 놓치고 있나. 내가 허겁지겁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나.
어쩌면 “네”하고 답하고 끝날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
“네가 나를 사랑하니?”
“네!”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니?”
“어, 네, 그런데요…”
“네가 나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니?”
마음이 복잡해지더라고요.
나의 질문들을 내려놓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나아갔는데
똑같은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물어보실 때마다 점점 나의 대답에는 확신이 줄어들더라고요.
나의 마음의 깊이가 어디까지일까. 사실 얕았던 걸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말뿐이었던 걸까. 정말 나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인가.
늘 하나님의 손만 구했던 건 아닐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적이 있었는가.
내 삶을 다른 것들로 채우기에 급급했었던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도록 마음을 다했는가.
본질을 놓고 씨름이 시작되었어요.
그 질문을 계속해서 다시 하신 이유가 깨달아지니 기본이라 생각했던 질문이 너무 어려워지더라고요.
나는 과연 하나님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가.
근데 제 안에 하나님 말고도, 혹은 하나님보다도 더 원하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여러 겹에 쌓여서 감춰져 있던 제 안에 있던 진심을 보게 된 거예요. 밀어내 버렸던 진심을.
그렇게 혼자 괴롭게 씨름을 하던 가운데 주일이 오고 예배에 갔는데 마침 그 주에 초청 목사님이 오셨어요.
원래 준비한 말씀이 있었는데 자꾸 다른 말씀을 떠오르게 하셔서
어젯밤에 급히 처음부터 다시 준비했다며 출애굽기 33장을 펼치시더라고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출애굽기 33:1-3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출애굽을 한 백성들은 그새 광야에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그 모든 기적을 너무 쉽게 잊은 채 애굽에 종으로 있을 때가 나았다고까지 하죠.
그러한 상황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백성들은 아론에게 신을 만들어달라 요구하고 아론은 금을 모아 송아지 형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이 송아지를 보며 애굽에서부터 인도하여낸 신이라 칭하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백성들을 멸하겠다고 하시지만 모세의 기도로 마음을 돌리시고
모세는 얼른 산에서 내려와 금송아지를 불사르고 백성을 문책하고 숙청합니다.
위에 나오는 출애굽기 33장은 그 후 나오는 말씀이에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라고 하시죠.
근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
그 앞에 천사를 보내서 길을 예비하겠다 하시지만 본인은 이 목이 곧은 백성과 함께 가지 않겠다 하십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출애굽기 33:12-17
근데 여기서 모세의 대답이 대단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는다면 아예 약속의 땅으로 보내지 말라고 말씀드리죠.
즉,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시지 않는다면 차라리 광야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 없이 천사들과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막이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보다 낫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모세에게 가장 중요했던 조건은 어디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인지였던 것이죠.
광야냐 약속의 땅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계시는지 아닌지가 중요했던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그냥 보내신다 한 것도 아니고, 미리 천사를 보내 그 앞길을 예비하겠다 하셨는데도,
또 천사가 함께한다는 것은 굉장히 든든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천사가 함께하는 약속의 땅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광야가 낫다고 하는 겁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출애굽기 33:15
쉽게 넘길 게 아니라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중심은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는가 아니면 약속의 땅 입성에 있는가.
제 경우에는 하나님과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를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점점 그 무게중심이 약속의 땅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았고 여전히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의 마음은 궁금하지 않고
그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만 조르고 있더라고요.
이 학교 들어가게 해주세요, 이 회사 들어가게 해주세요, 이 사람 만나게 해주세요,
이러한 축복들을 부어주세요 등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내가 생각하는 약속의 땅,
내 기준에서의 축복을 부어달라 기도하고 있더라고요.
너무나 많은 경우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느냐 마느냐가 가장 중요하고
하나님이 함께 가시는지는 이차적인 조건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혹은 천사와 함께하는 길이라면 그 자체로 너무 좋은 조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 아닌지는 아예 배제되어버리는 경우도 있고요.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그것만으로 만족하기가 쉬우니까
어쩌면 하나님과의 동행보다 약속의 땅을 더 원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결정권을 주신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와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가거나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 속에 머무를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까요? 우리는 무엇에 더 마음이 흔들리고 기울어질까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 84:10
모세의 답변. 모세의 요청. 모세의 고백.
당신의 천사와 함께하는 약속의 땅보다
당신과 함께하는 광야가 더 좋습니다.
그것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당신과 함께하는 곳이,
내게는 그곳이 바로 진정한 약속의 땅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있잖아요, 그 스물네 번째
24. 광야와 약속의 땅, 그 사이에서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