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해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을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옳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네 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그중 라헬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오랫동안 아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다른 아내들에게서 아들 열 명을 둔 뒤에야 라헬이 요셉을 낳았습니다. 야곱이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그 형들에게는 한 번도 입히지 않았던 채색옷을 입힐 정도였습니다. 당시 물감이 귀했으므로 값비싼 채색옷을 아무나 입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요셉에게만 명품 옷을 입힌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게다가 요셉의 꿈 이야기가 형들의 미움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형들의 곡식 단이 자기 곡식 단에 절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꿈 이야기가 형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결국, 형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버린 후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혀 죽은 것 같다고 거짓말합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립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가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너무 극적인 전략 아닙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탈출하여 복수극을 펼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포자기하고 노예로 살다 죽을 것입니다. 요셉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는 자살하지도 않았고, 복수하지도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선택하는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주어진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애굽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몰입합니다. 이 몰입은 단지 타협이나 적응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이상입니다. 이 몰입은 믿음으로 상황을 온전히 수용하는 지극히 영적인 삶입니다. 성실히 일한 요셉은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되어 주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합니다. 그런데 또다시 뜻밖의 고난이 찾아옵니ㅏㄷ.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요셉이 자신을 범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을 겪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백을 주장해야겠지요. 그러면 보디발이 요셉의 말을 믿고 아내를 내쫓을까요? 아니면 끝까지 우기는 아내 때문에라도 요셉을 죽이고 말까요? 요셉이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적극적으로 해명했다면 요셉은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침묵한 채 감옥으로 갑니다. 이 침묵은 온전한 수용입니다. 또한 온전한 몰입입니다. 그래서 영적입니다. 지극한 영성입니다.
감옥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억울함에 못 이겨 감옥 창틀에 목이라도 매고 죽어야 할까요? 기회를 엿보다 탈옥하여 보디발의 아내를 처단해야 할까요? 그냥 자포자기하고 죄수로 늙어 죽을까요? 요셉은 이 중 어느 것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합니다.
요셉은 감옥의 일을 관장하는 전옥이 됩니다. 그는 옥에 갇혀서도 결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가 일상을 충분히 받아들였다는 삶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곳에서 왕의 측근인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의 꿈을 해석해 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자포자기했다면 그들이 꿈을 꾸었든 말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러나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몽해 줍니다. 그의 말대로 떡 굽는 자는 처형되었고, 술 맡은 자는 복권되었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자에게 복권이 되면 자신이 석방되도록 도움을 청했지만, 그는 요셉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러면 서운하고 분노한 나머지 화병에라도 걸리지 않겠습니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더 버팁니까? 내 인생이 도대체 왜 이러냐고 절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모든 삶의 환경을 수용하고 상황을 인정함으로써 부당하고 오해받는 일에 함몰되지 않았습니다.
분노에 찬 삶은 일상에 함몰되는 삶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일상에 함몰됩니다. 그 증거가 지치는 겁니다. 피곤해서 못 견딥니다. 그건 일상에 짓눌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일상에 적극적으로 몰입하는 사람은 짜증 내거나 분노하지 않습니다.
요셉만큼 분노의 이유와 명분이 충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충분히 항변할 만했지만 상황에 함몰되지 않았고, 주어진 현실에 몰입했기에 삶을 적극적으로 바꾸어 가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왔습니다. 바로가 꾼 꿈을 해석할 자가 없자 술 맡은 자가 요셉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요셉은 드디어 서른 살이 되었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가 왔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살면서 애굽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왕궁을 배웠습니다. 바로의 꿈을 지혜롭게 해석한 요셉은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됩니다.
여러분은 일을 어떻게 대합니까? 금요일만 손꼽아 기다리고 월요병에 시달립니까? 언제 또 징검다리 연휴가 시작되나 목을 빼고 기다립니까? 월급은 언제 나오나, 올해 연봉 인상은 얼마나 될까 자주 생각하면서 일합니까? 그렇다면 이미 일상에 몰입하기보다는 일상에 함몰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상은 우리의 영성을 어떻게 빚고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일상에 삶을 다 소진하고 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상에서 날마다 영성을 가다듬고 키워 갑니다. 요셉은 후자의 사람입니다. 일상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일상에 몰입하는 삶을 삽니다. 이 삶이야말로 무엇보다 영적입니다.
요셉의 영성은 성전이나 수도원에서 빚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일터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일상은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입니다. 동의하기 어렵습니까?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을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옳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수용하고,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서 삶에 몰입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116-120).
조정민, “왜 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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