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나의 세상에 새기고 싶었던 것들에 대하여

- 그동안의 안부를 [17]

by 일요일은 쉽니다


당신이 나의 세상에 새기고 싶었던 것들에 대하여

- 그동안의 안부를



되게 추운 겨울날로 기억하는데 기말고사를 앞두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우연히 예전에 받은 메일 한 통을 발견하게 되었다. 메일을 다시 보게 된 해는 2012년 12월이었고 메일이 처음 도착한 해는 2002년 12월이었으니 딱 십 년 만에 보게 된 메일은 할아버지가 건강하시던 시절에 보내신 편지였는데 짧은 내용에도 당신의 마음이 여전히 만져지고 느껴져서 시험을 준비하다 말고 도서관에서 한참을 울었다.


‘서윤아

보고 싶다

너보다 더 영리한 아가는 없는 것 같아

오늘따라 더욱 우리 서윤이가 보고 싶구나

이제 어엿한 초등학교 상급생이겠지

영리하고 예쁘고 마음씨 착한 우리 서윤이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구나


서울에서 할아버지가

2002년 12월 16일’


어엿한 초등학교 상급생 시절도 지난 지 오래, 대학이라는 곳에 진학하여 집을 떠나 지구 반대편에서 뜻을 펼치고 있었는데 당신은 이러한 나의 모습을 보고 자랑스러워했을까. 내가 당신의 마음의 따뜻한 자랑이던 날들이 있었는데, 그 시절보다도 더욱 성장한 나를 본다면 당신은 기뻐했을까.


우리 할아버지는 뒤늦게 발견해 이미 많이 진행되어 있던 희귀암과 오랜 시간을 싸우시다가 2012년 5월 29일 이 세상을 떠나셨다.


작별하기 하루 전날, 오랜만에 밥도 잘 드시고 편안히 주무신다 생각했던 평안했던 병실 안으로 얼마 후 갑자기 모니터에 이상 신호가 떴다며 의사와 간호사들 여럿이 기계를 끌고 들어와 응급처치하던 한 번의 위기를 맞고. 원래는 중환자실로 가셔야 했지만 기적같이 자리가 나 급히 표를 당겨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서 건너오고 계시던 삼촌이 있었기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일반 병실에서 보내기로 하고선.


할아버지는 의식이 없으신 상태였고 그전에 몇 주 동안 집에서도 잘 움직이시지를 못하고 소화하시지를 못하며 발이 많이 붓는 등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계셨던지라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만.


다만 눈조차 감고 계신, 겨우 호흡만 유지하고 계신 할아버지를 보면서도 아무도 생명의 끈을 놓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지속되면 될수록 옆에서 병간호하는 가족에게도 무리가 가는데, 아무런 말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할아버지를 보면서도 할머니는 이렇게라도 옆에 계시면 좋겠다는, 이렇게 만이라도 계속 옆에 계시면 좋겠다는, 이렇게라도, 이렇게 만이라도를 몇 번이나 되뇌시고 또 되뇌셨다.


지난 몇 년 끈질겼던 병마와의 싸움에서 진통제에 마저 의지할 수 없어 지치셨을 당신은, 부디 이번에는 아무런 아픔도 또 고통도 없는 저 높은 곳으로 가셨기를 바라며 당신 없는 시간을 보내왔지만.


그러나 끝까지 우리를 위하고 우리를 걱정하는 마음에 일찍 떠나버린 당신이 너무 보고 싶은 날들이 있다. 너무 보고 싶어 이렇게라도 기록하고 기억하려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는 날에는, 당신이 내 삶에서 차지했던 공간이 너무 커 바람이 그사이를 뚫고 들어와 마음을 차갑게 서릴 때가 있다. 그런 날들에 나는 당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들을 둘러보려 하지만, 당신과 함께 지하철역 앞에 뻥튀기를 사러 가던 손수레 할아버지도 이제 더는 나오지 않으시고 당신과 함께 들리던 몇십 년 자리를 지켜온 약국도 몇 달 전 문을 닫아버렸다. 그렇게 하나둘 당신과 함께했던 세상이 조금씩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그 공간을 채워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내 삶에서 당신의 공간을 채우지 못했다. 뻥튀기를 팔던 자리에는 요구르트를 팔고 약국이 있던 자리에는 오토바이 가게가 들어섰지만, 당신이 있던 내 마음은 여전히 허한 채 비어있다. 당신의 빈자리는 나의 마음에 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머물렀던 모든 마음에 그대로 남아있다.


모두가 주저앉아버린 나를 구경하며 이내 돌아서고 나마저 내 모습이 비참해 나 자신을 외면하던 그때 유일하게 당신만이, 당신만이 내게 여전한 한결같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서랍 안 깊숙이 숨겨버린 합격통지서를 당신은 꺼내 가슴에 소중히 품고, 나는 자존심이 상해 고개를 숙이고 다니던 때에 당신은 친구들에게 꺼내 보여주시며, 나는 보잘것없다고 이미 나 자신을 상처 내고 찌른 후 당신은 그 모습을 가장 자랑스럽다고 너무 대견하다고, 나는 무너진 채로 호흡조차 하기 괴로워 외면하던 나 자신을 당신은 사랑한다고 너무 사랑한다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손녀라고.


낯간지러워 평소에 하지 못하는 말을 하기 위해 당신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전화 너머로 힘에 겨워 겨우 죄송하다는 말만 숨과 함께 뱉어내던 내게, 그 날.


“할아버지는 우리 서윤이가 제일 똑똑하고 자랑스러워.

할아버지한테는 우리 손녀가 제일 멋지단다.

서윤아 사랑한다. 할아버지가 사랑해.”


당신에게 자랑이 되지 못해 마음이 쓰려 겨우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를 뱉어냈을 때, 내 울음이 전화기 너머로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당신은 내가 그 말과 함께 전화를 얼른 끊을까 하여 망설임 없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할아버지가 사랑한다고.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당신은 내가,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던 그때의 나도, 그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그 여느 때와 변함없이 가장 귀하다고 말해주었다. 한 번도 내가 안겨드린 실망을 실망이라 하지 않으시고 더 깊은 따뜻함으로만 품던 당신이었다.


당신이 아직 믿기 전, 당신을 다시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을까 물은 질문에 천국 어디에서 만날지 장소도 미리 정해놔야 한다는 답을 듣고서는 당신께 신난 마음으로 우리는 홈플러스에서 만나자고 달려가 말한 것을 당신은 기억하고 있을까. 그 시절 여름이 되면 놀러 오던 한국에서 그곳에 가면 크고 시원하고 맛있는 것과 신기한 것들이 많아 그곳에서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했던 것 같다. 이제는 이전처럼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할 필요도 없고 아파트에서 내려가면 몇 걸음밖에 안 되는 곳에 있지만 그곳에 그저 필요에 의해서만 가게 되는 것은 왜일까. 아마 내가 커버린 후 그 크고 반짝이던 곳이 더는 크고 반짝이게 느껴지지 않아서이겠지만, 또한 당신이 이곳에 더는 없어 함께 장을 보러 가지 못해 그런 게 아닐까 한다.


저 높은 곳에서 당신은 가끔 우리 생각을 할까. 가끔 우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과 철없던 모습들과 환하게 웃던 모습들과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면 당신이 두 팔 벌려 서 있던 현관으로 단숨에 뛰어가 품에 안기던 우리의 모습들이 생각나고는 할까.


나는 당신이 우리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고 있으시기를 바란다. 오랜 시간 그 누구도 나눠서 질 수 없던 고통을 혼자서 이겨내셔야 했던 당신은, 이 땅에서의 힘들었던 모든 것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저 행복하고, 또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기억할 테니. 당신이 우리를 위하던 마음, 아끼던 마음, 챙기던 마음, 사랑하던 마음 그 모두 다 내가 기억할 테니.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그때 달려가 우리가 다시 그곳에서 만나는 그 날까지 이 땅에서 견뎌내셔야 했던 모든 고통은 잊으시고 당신은 그저 편안하고 또 편안하기를.


당신은 늘 나를 있는 그대로 아껴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주었기에.

이 세상에서, 그리고 저 세상에서도 당신은 나의 태산이자 나의 위로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격이 충분하다고. 당신은 자격이 충분하다고.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내 마음을 아리게 하는,

나를 울리고 나를 미소 짓게 하는,


나의 태산

나의 위로

나의 하늘

나의 친구


당신의 이름, 그 넉 자


당신은 나의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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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의 세상에 새기고 싶었던 것들에 대하여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