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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은 쉽니다 Aug 18. 2021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다정한 얼굴로 마오리를 지켜보던 그날 그대로 지금도 거기서 웃고 있었다


210814, 휴일을 앞두고 오랜만에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가공되지 않은 생각들입니다



독서모임을 잠시 쉬게 되면서 주말에 딱히 독서모임용은 아니어 보였던 책 한 권을 읽었는데, 대신 베스트셀러답게 책을 내려놓기가 힘들었고 슬픈 마음이 오래가서 짧게 글을 남겨보기로 했다. 


"매일 기억을 잃는 너와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사랑을 했다."


"넌 겸손하게 아니라고 하지만 난 네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넌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척하지만 사실은 소중한 걸 갖고 있어. 예를 들면 다정함이라든지...

우리 아버지가 그러더라. 잘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게 훨씬 쉽지 않다고. 그러니까 가미야 넌 남들이 말하는 잘난 사람보다 훨씬 훌륭해. 이런 말은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고생하는데도 비뚤어지지 않았어. 이것도 아버지가 한 말인데, 고생한 사람은 대개 비굴해지거나 성격이 나빠진대. 그런데 넌 다정하거든. 아주 많이. 아주아주 많이." 


S: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소중한 걸 갖고 있고, 그 소중한 것으로 예를 든 다정함은 두고두고 생각해도 참 소중한 성품. 예전에는 "착한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내가 의미했던 착함은 다정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아주 많이 다정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한 번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이 애는 어째서 이렇게 다정한 걸까. 
어제의 우리가 느꼈던 것처럼 오늘의 나도 또 그렇게 느꼈다. 내가 중요한 것을 잊어도 그 애는 신경 쓰지 않고 오늘도 또 다정하게 대해준다.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 가는 남자친구님의 뒷모습을 보며 해바라기 조화를 꽉 쥐었다.
가슴이 뭔가를 호소하듯 죄어들었다.
어쩌면 그 애를 좋아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S: 우리 모두에게 분명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깨달은 순간. 그 순간이 한없는 설렘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가슴이 뭔가를 호소하듯 죄어"드는 어떠한 아픔일 때도 있는 것 같아 읽으면서 내 마음도 죄어들었다.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순간, 내 마음은 한없이 설레었을까 아니면 한없이 죄어들었을까. 백아연의 <그대여야만 해요>가 생각나는 걸 보면, 후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가슴이 다시 사랑을 시작하지 않기를 호소하듯 죄어드는 것 같은 날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가자, 히노. 축제는 오늘뿐이니까 즐기자."
"오, 그거 좋네. 같이 즐기자."
우리는 그 뒤 흔한 축제 풍경 속에 끼어들었다.
어디에나 있는 커플처럼 신나게 떠들고 먹을 것을 양손 가득 들고 쓸모없는 것을 사며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을 즐겼다. 
...
많이 웃었다. 여름의 추억을 하루에 다 담았다.
정말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자연히 그 애에게 이끌리고 그 애도 나를 아껴주었다. 


S: 연애를 안 한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한편으로는 연애가 어떤 것인지 잘 생각나질 않는다. 오랫동안 운전을 하지 않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면서 연애의 정의를 내린다면, "신나게 떠들고 먹을 것을 양손 가득 들고 쓸모없는 것을 사며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을 즐[기는 것]"이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혼자서는 절대 하지 않겠지만, 둘이라면 쓸모없는 것도, 평소라면 하지 않을 것도 웃으면서 하겠지. 


그때 나는 웃으면서 했던 것 같다. 그 순간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으로 여기며

그래, 여름의 추억을 하루에 다 담았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노력할 수 있느냐고 가끔 가미야에게 물어보고 싶어 진다.
물어봤자 그 녀석은 분명 태평하게 이런 말로 대답할 것이다.
"히노를 좋아하니까." 


S: 좋아한다는 이유야 말로 모든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유겠지,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누군가를 좋아해서 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에너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좋아한다고 타인을 위해서 뭐든 다 할 수 있는 거야? 난 그런 거 잘 모르겠어서."
자조하는 듯한 투로 묻자 가미야는 표현을 골라서 대답했다.
"뭐든 다 하는 건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해."
"그런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것치곤 무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추긍하듯 계속 묻자 가미야는 황혼에 물들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봤다.

"진짜로 무리는 하지 않고 할 수도 없어. 하지만 약간 무리해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약간 무리해서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건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때 본 가미야의 옆얼굴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어째선지 평범하고 다정한 얼굴이 빛나 보였다. 
...
"...지금은 순수하게 히노랑 보내는 하루하루가 즐거워. 약간 무리해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어. 히노가 나를 놀라게 하고 다시 보게 해줘. 이런 나도 조금이라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해주거든." 


S: 책을 통틀어서 제일 한 대 맞은 것 같았던 장면... 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만 한다고 했을 때는 현실적인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점점 빛바래가는 흔한 인연들은, 할 수 있는 것도 점점 안 하게 되는 게 그러한 관계인 것 같아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것도 참 멋진 것이 아닐까, 했다. 


근데 그다음 설명이 더 찡했다. 약간 무리해서라도 할 수 있는, 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게 행복한 일이 아니냐는. 행복을 새롭게 정의한다면 그런 걸까. 무리해서라도 하고 싶은 일이 생기는 것. 사랑을 재정의한다면 무리해서라도 무언갈 해주고 싶은 사람이 생기는 것,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 것. 내가 무리해서 내가 해주는 것임에도 내가 더 큰 기쁨을 받는 것. 그 사람을 위해 내가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 


한동안 나는 괜찮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만나면 안된다고 마음 깊이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사람은 안 변하니까, 그리고 나는 너무 지쳤으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가미야는 정말 다정한 사람이 맞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정말, 그 다정함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또 깨닫는다. 


"난 기억을 잃기 전의 히노랑 접점이 거의 없으니까. 그러니까...... 혹시 내가 죽어도 일기에 등장하지 않으면 히노한테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어."


S: 히노에 대한 가미야의 마음의 크기를 추적한다면 최종 단계에서는 그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의 삶에서 나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내도 되는... 감히 나의 지난 마음에 빗대어 보자면, 멀리 있더라도 건강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그런 마음을 뛰어넘지 않을까? 숫자로 잴 수 없는 마음이 글로 재어지는 거 같아 감히 그 크기에 마음이 아리기도, 놀라기도 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요? 잊어도 되는 걸까요?"
크로키북에 그려진 청년의 얼굴이 떠올라 속마음을 토해내듯 그렇게 말했다.
누나가 맑은 눈으로 나를 봤다. 안심시키려는 건지 미소를 지었다. 
"계속 잊고 살아도 돼. 사람은 원래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언니는 어떠신데요?"
내가 묻자 가미야의 누나는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 되었다.
그때 주문했던 음료가 나왔다. 찻잔에 담긴 호박빛 홍차를 바라보던 누나가 차를 마셨다. 
나도 내 커피를 마셨다. 

"나한테도 결국 도루는 과거가 될 거야. 내가 계속해서 소설을 쓰고 있더라도 인터뷰하다가 도루의 죽음을 무심코 입 밖에 낼 수 있을 정도로. 언젠가는 과거의 일부가 될 거야. 어떤 상처든 한번 입고 나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아. 상처는 기억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픔이 계속되진 않거든.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해. 추억 속의 바람이 문득 불었을 때, 원고를 쓰다가 키보드로 도루란 글자를 쳤을 때 생각나는 일은 있어도." 


S: "계속 잊고 살아도 돼. 사람은 원래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최근에 들었던 조언 중 가장 슬프면서 또 가장 힘이 되는 조언이 아닐까 했다. 삶은 짧으면서도 길고 길면서도 짧아서 너무 사랑했지만 더는 볼 수 없는 사람을, 혹은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기억을, 잊고 살아야만 살아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살아야만 살아낼 수 있음을, 도루의 누나는 사람은 원래 그렇게 살아간다고 표현한 거 같다. 사람은 원래 그렇게 살아간다고... 


계속 잊고 살아도 된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나 보다. 


갑자기 도루와 함께 보낸 시간이 빠른 속도로 재생되는 영상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모두 언젠가는 잃을 것들이다. 없어질 것들이다.
그래도...... 온갖 것이 변해간다 해도. 인생을 삶으로써 과거가, 아름다운 것이 흐릿해진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있다. 
마음이 그리는 세계는 언제까지고 빛바래지 않는다.

"도루에 대한 기억을 또 되찾을 수 있었어. 하지만 아직 전부 기억난 건 아니야." 
마오리가 연필을 놀리며 말했다. 그 애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좋아했던 그 애는 이제...... 없어. 하지만 기억은 내 안에 존재해. 몸속에, 마음속에 잠들어 있어. 기억해내면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 있어. 그건 잘 말할 수 없지만 희망 같은 거란 생각이 들어. 세상은 서서히 그 애를, 도루를, 잊어갈 거야. 그래도......" 

마오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을 닦고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왜 울지? 아직 아픈 걸까. 그렇지만 따스하기도 하거든. 난 아마 아직도 그 애를 좋아하는 것 같아. 하지만 괜찮아. 언젠가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거야. 행복에 손을 뻗을 거야.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조금 더......" 

나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말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상실뿐인 세상에서 도루는 분명히 거기 있었다.
마오리 안에서 도루는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
마오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애는 그런 표정인가. 

마오리가 그린 도루는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다정한 얼굴로 마오리를 지켜보던 그날 그대로 지금도 거기서 웃고 있었다.


S: 상실뿐인 세상이지만, 그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는 남아 있다. 상실이 앗아갈 수 없는 게 있다면 마음속 깊은 곳의 기억 아닐까.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에서 제일 좋아하는 대사를 꺼내보자면, 행복했던 순간을 생각하라는, 그 기억으로 살아진다는 아버지의 대사를 떠올려보면 그래, 인간은 그 기억만으로도 살아진다. (바로 위에 잊고 살아야만 살아간다는 말과 상반되지만, 왜 둘은 정반대의 말이 아닌 같은 뜻인 것만 같을까?) 그 기억이 영원히 또렷하게 남지도 않겠지만, 그 기억은 마음속에서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의 파편처럼 조각조각 남아있는 단서들을 조합해야 겨우 떠오를 만큼 점점 희미해질지라도, 상실뿐인 세상에서 도루는 분명히 거기 있고, 마오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도루는 하나같이 웃고 있다. 


다정한 얼굴로 마오리를 지켜보던 그날 그대로

지금도 거기서 웃고 있다. 


당신의 도루도, 

나의 도루도. 



커버 사진

"Summertime sadness" https://unsplash.com/photos/FLigbWjCZz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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