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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은 쉽니다 May 11. 2023

사랑하는 지선아

내가 너를 너무나도 사랑한단다


내가 너를 너무나도 사랑한단다 지선아

230511, 사랑하는 지선아



사랑하는 지선아,


늘 너와 함께하지만 다가올 주말은 네 생에 가장 특별한 날 중 하나이니 편지를 쓰고 있단다.

꼬마이던 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언제 어엿한 어른이 되어 이렇게 가정을 꾸리게 됐는지 인생은 늘 감사한 일뿐이구나. 유난히 더 아빠를 그리워할 날이기도 할 테니 미안하기도 하면서,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그곳에 함께 하고 있을 아빠를 기억하며 가장 행복한 하루가 되길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룻밤이 지난 것만 같은 시간이 흘렀을 때 새로운 가정을 꾸린 너도 한 가정의 아내에서 또 엄마로 성장해 있겠지. 자식이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조금만 있으면 네가 아빠의 마음을 알게 될 테니 벌써부터 참으로 기다려지는 순간이구나. 돌아보니 너는 나에게 한없는 기쁨이기만 했다. 지금은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자식은 부모에게 영원한 기쁨이기만 하구나. 너는 아직도 어렸을 적 피아노 반주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미안해하고 있지만 아빠는 너에게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어. 네가 부담을 느껴서 거절했다는 것도, 거절하고 나서는 마음속으로 미안해한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거든. 아빠에게는 그저 너에게 피아노 반주를 부탁할 수 있다는 것도 특권이었고 기쁨이었다. 네가 나중에 부모가 되면 알 거야. 자식은 그저 존재만으로도 끝없는 행복이라는 걸, 세상에 그런 사랑도 있다는 것을.


본의 아니게 엄마와 지수와 지민이를 맡긴 것 같아 한편으로는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독해지고 악해지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옳은 것인지 지나온 내 삶으로 너와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고 믿고 싶지만, 걸어온 길에 힘듦과 어려움이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진심을 모두 덮어버리진 않았는지 걱정도 됐다. 다만 아빠는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 네가 보기엔 힘들고 외로워 보였을지 몰라도 아빠는 아빠가 걸어온 길에 단한순간의 후회도 해본 적이 없단다. 그 길을 너와 지수와 지민이 그리고 엄마와 함께했지 않니.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을 거야. 아빠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었단다.


꿈에서라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싶은 마음에 아빠는 가끔 너의 꿈속에 찾아가기도 했어. 그런데 미안하기도 한 것은 이곳 천국에서는 그곳 세상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너무 평안하고 평화롭단다. 그래서 아빠는 짧았던 생 동안 좋았던 것도 그렇지 않았던 것도 모두 그곳에 두고 온 것 같다. 더 이상 선명히 기억나지 않아. 잠에 들며 진정한 자유를 얻었어. 이렇게 말한다면 네가 서운할까? 아니야, 지선이는 이해할 거야. 설령 좋았던 기억들조차 같이 묻어버리게 되었더라도, 그 땅에서 지치고 힘들었던 걸 다 잊고 이제는 그 시간을 지나왔다는 것만으로 너는 기뻐해줄 거야. 아빠는 알고 있어.


그게 나의 마음이란다.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하기엔 일어나기조차 힘든 날에,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오는 점심에, 혹은 밤공기마저 쓸쓸하게 느껴지는 퇴근길에 오늘따라 커피조차 씁쓸했다는 결론을 내려버리는 그런 날들에 은혜라는 두 글자로 삶을 담고 싶지 않겠지만 아빠는 그런 삶 속에서도 그 두 글자에 네 인생이 담겼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은혜였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지만, 사실 나도 그 말을 하기까지는 인생 전체가 다 걸렸단다. 그러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어쩌면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중요하지 않은 걸 지도 몰라. 네가 괜찮은 순간에도 괜찮지 않은 순간에도 아빠는 다 알고 있어. 네가 결국엔 모든 일을 넉넉히 이겨낼 것을.


만약 아빠 보러 생의 딱 한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어떤 순간을 택할까? 트럭에서 팔던 강냉이를 한 포대 사 와서 마루에서 다 같이 TV를 보며 먹던 그 순간? 혹은 아침에 식탁에 둘러앉아 토스트를 해 먹던 그 순간? 네가 정한이와 내려와서 같이 무를 뽑던 그 순간? 아니면 지수와 다 같이 감을 따던 순간? 혹은 너에게 이메일을 쓰기 위해 주민센터에 가서 열심히 컴퓨터를 공부하던 순간? 혹은 네가 선물한 노래방 마이크로 신나게 노래를 부르던 순간? 아니다, 네가 구워준 부침개를 먹던 순간일까? 혹은 안개가 자욱한 새벽에 너와 자전거를 타던 순간일까. 졸리다고 눈을 비비던 너를 억지로라도 깨워서 때로는 너의 앞에서 때로는 너의 뒤에서 같이 자전거를 타던 그 아침 시간, 그리고 해 뜨는 아침을 맞이하던 순간. 이렇게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걸 보니 모든 순간이 은혜였다.


아빠는 아빠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러 온 거야. 지선이 너도 네가 사랑하는 아버지와 나를 만나러 이곳에 올 날을 고대하고 있단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에 딱 하나 아쉬움이 남는 게 있다면 딸로서의 을 내려두고 아내로서 여자로서의 새로운 을 맞이하러 식장에 걸어 들어가는 순간 네 손을 꼭 잡고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것 하나 아빠 마음에 아쉬움으로 남는구나.


그래도 지선아, 알잖니. 네가 예식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퇴장하는 순간까지, 너의 기쁜 날과 너의 슬픈 날, 너의 출근길과 너의 퇴근길, 너의 결혼식과 너의 팔순잔치까지도 너의 하나부터 열까지 그 모든 순간에 아빠는 너와 함께하고 있다는 걸. 단순히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아니라 너를 나의 어깨 위에 올리고, 너를 나의 등에 업고 너의 걸음걸음마다 함께 춤을 추며 걷고 있어. 그저 보이지 않을 뿐 들리지 않을 뿐 아빠는 너의 모든 순간에 함께 춤을 추며 걸어가고 있어. 때로는 네 오른쪽 어깨에, 때로는 너의 그림자 옆에, 때로는 너의 떨구어진 고개 앞에, 때로는 너를 내 등에 업고 아빠는 그 모든 순간 너와 함께하고 있단다. 인생의 황무지에서도, 삶의 흉년 속에도 너보다 앞서 가며 너를 호위하고 보호하고 나의 눈동자처럼 지키고 있단다. 물리적으로 함께해야만 함께였던 삶을 떠나 우리는 오히려 지금 가장 친밀하게 동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 물리적인 자리는 너만의 가정이 대신하게 될 거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얇은 막이 존재한다지만 너의 가정 안에는 그 얇은 막도 투명하게 사라지길 아빠가 기도하고 있어. 정한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래서 네가 꾸리게 될 가정도 한없이 재밌고 유쾌한, 행복한 가정이 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정한이는 참 듬직한 아이야. 정한이도 아빠의 마음을 알 거야.


이곳은 계절 없이 매일이 봄이고, 여름이자, 가을이고, 겨울이다.

매일이 영원한 이곳에서 아빠는 이제 모든 것이 괜찮다.

이곳에서 아빠는 매일이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자 겨울인 것처럼

그곳에서 지선이 너도 너의 삶을 살거라.

빛나고 아름다운 지선아,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누리며

황무지에서도 흉년 속에도 때로는 흘러넘치고 때로는 숨어있는 것만 같은 은혜를 찾고 누리는 삶을 살거라.


지선아, 믿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아.

나도 믿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을 붙잡고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던 그 모든 순간들을 버티고 이겨냈던 게 아닐까. 나를 살린 마음이니 참 고마운 마음인데, 너에게도 너를 버티게 해주는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선이도 아빠 마음을 알지 않을까?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는 나의 딸 지선이에게

사랑한다는 말로도 부족하지만, 내가 너를 너무나도 사랑한단다 지선아

사랑하는 아빠가



커버 사진

"Summertime sadness" https://unsplash.com/photos/FLigbWjCZz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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