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허송세월하듯 이러저러한 의미 없는 일들을 하고, 산란하게 부유하는 생각의 편린들을 돌아보다가 무심코, 내가 꽤 오랫동안 책과 글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사실이 강박과 초조함을 야기하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나한테 그런 때가 있었나?' 한참을 되뇌어봐야 가까스로 그당시 느꼈던 감정의 비슷한 언저리에 조금이나마 닿을 수 있을까 말까 하다고 느껴질만큼 낯선 느낌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사실 책과 떨어져 지낸 시간들이 더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를 정의 내림에 있어서 '책을 좋아하는'이라는 표현을 자주 상기해내 덧붙이곤 한다. 아마도 나는 그러한 형용사를 덧붙여야만 비로소,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그려낼 수 있다고 느끼는 것도 같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나의 실질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의식이나 명제적인 생각에 근거한 것에 가깝다. 과거의 중요한 경험이 나의 의식 또는 자아 그 어딘가에 깊이 새겨져, 현재 나의 경험과 전혀 일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옅어질 수 있을 지언정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일종의 깊게 패인 자국과도 같겠다.
나에게 깊게 새겨진 자국 중 또 다른 하나는 갈 곳을 잃고 유영하는, 그러나 은은하게 자주 고개를 드는 슬픔, 고립감, 분노의 뭉텅이다.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내가 이 뭉텅이들 중에 '분노'의 직접적 화살을 맞은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유년기부터 나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분노, 원망, 우울, 좌절, 불안, 불행, 차가움, 고립감, 외로움의 분위기는 나의 내면을 감싸는 얇고도 견고한 막을 형성하였다, 고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홀로 하는 시간동안에 서서히, 차분하게,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올라와서 나의 몸과 마음을 감싼다. 익숙하게 나는 귀를 막고 눈을 내리깔고 혼자만의 생각과 음율과 시간에 빠져든다.
글과 책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고 있을 때가 많은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들은 혼자만의 편안하고 흥미롭고 생기 넘치는 세상 속에서만 온전한 공감을 느끼지만, 결국 그곳에 몰두해있는 동안 흘러버린 시간동안, 나의 삶은 오히려 퇴보해가고 있을 뿐이다.
현실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온 몸이 부서져나갈 정도의 단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부족하고 하찮아 보이더라도. 그리고 나는 그 작은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수 백번 때로는 수 천번, 수많은 밤을 견뎌가며 스스로를 부수고 흔들어 나가려 애쓰는 이들과 함께 이야기와 마음을 나누곤 한다. 그것은 나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많은 한계와 좌절, 고통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시도를 곁에서 응원하며 목도하는 것이 나에게도 수많은 생각의 지점들을 남겨준다.
그것들을 잊지 않기 위한 기록들, 그것이 나에게는 큰 의미가 될 것이라 생각하며, 어려운 첫 발걸음을 내딛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