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대로 살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삶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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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 결혼 후 여자친구(남자친구)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면 그 집 엄마(아빠)를 봐라. 딸은 꼭 자기 아빠랑 똑같은 사람을 남편으로 삼는다. 모두 이런 류의 말,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종종 고민상담이나 신세한탄을 하면서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자주 있는데, 아마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분들의 마음가짐은 비슷할 것 같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운명이고 업보이고 천형이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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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대로 산다'는 말을 들을 때 내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2가지 키워드가 떠오른다. 하나는 "기질"이고, 또 다른 하나가 "가족환경"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족환경은, 그러니까 내가 보고 자란 우리 가족, 부모-자녀관계, 부모님의 부부관계 등에 대한 기본적인 '틀'을 말하는 것인데, 오늘은 이 둘 중에 두 번째인 "가족환경"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상담을 할 때 왜 자꾸 다 지난 힘든 과거 이야기나 가족관계를 물어보는지 궁금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꽤 흥미롭고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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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는 모든 대인관계의 원형(stereotype)이 된다. 가장 기본값이자 일종의 기본틀로 작용하므로 거푸집 같은 것으로 봐도 좋다. 이 거푸집이 여러 개이면 좋고 실제로 여러 개인 사람도 있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했거나 인지적 융통성이 부족하거나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계속해서 이 틀만을 반복해 사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꽤, 많다.
인간은 추론하고 연결 짓고 개념화하는 작업을 아주 좋아한다. 이렇게 해야 정보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사한 경험을 여러 차례하다 보면 그 안에서 유사한 의미를 파악해 하나의 범주에 집어 넣어 버리는데, 이는 효율적이긴 하지만 이후에 이와 유사한 경험이나 정보를 얻게 되면 꼼꼼한 정보처리 작업 없이 집어 넣다 보면 계속해 어떤 상황이 반복된다고 여기게 되며, 자신의 믿음을 실현시키는 환경을 조성해버리기도 한다. 이 거푸집을 인지행동치료에서는 심리도식(scheme)이라고 부르고,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투사적 동일시'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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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되면 눈치 빠른 분은 글의 핵심주제를 대충 파악하셨으리라 예상한다. 그렇다. 우리가 이 '팔자'를 '대물림'하는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심리도식을 1) 알아차리고, 2) 변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일단 당신이 이 패턴을 '알아차렸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심리상담의 거의 전부이자 가장 핵심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알아차림'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깨달음이 지적인 통찰과 개운함을 줄 수는 있지만, So What? 그래서 어떻게 할건데? 라는 실질적인 고민이나 방법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막막함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반가운 결론을 먼저 스포하자면, 우리에겐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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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에게 반복되는 어떤 중요한 심리도식, 패턴, 거푸집, 원형을 알아차렸다면, 그래서 어떤 사건이든 항상 이 틀을 통해 해석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들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면, 우리가 할 다음 일은 '이 새로운 정보에 근거한 새로운 해석, 새로운 행동방식'을 시도해 보는 것이 된다. 물론 이 노력은 쉽지 않다. 새로운 시도 하나 하나가 나에게는 아주 큰 용기를 동반해야만 하는 힘겨운 발걸음이고, 다만 이것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새로운 행동, 인지, 감정 패턴을 만들어내면 점점 더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저 아주 약간의 방향 전환(한 1도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열 걸음, 백 걸음, 천 걸음을 가다 보면 어느새 내가 향하는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면 좀 더 와닿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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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약간의 방향 전환을 동반한 새로운 시도를 해 보는 것'이 심리상담에서 하는 일들이기도 하다.
익숙하고 자동적이어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 행동에서 변주를 주는 것. 벗어나는 것.
예를 들어,
단 한번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 답답한 엄마와의 관계에서, 엄마에게 복수하고자 나 또한 엄마를 무시하고 반응하지 않았던 패턴이, 친구, 연인, 자녀 등 다른 좋은 관계에서 재현되면서 문제가 반복되고 힘들어진다면, 나의 삶에서는 전혀 없던 반응이지만 그래도 용기 있게 잘못을 인정하고 그때 내 마음이 어떤지, 상대의 반응과 태도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는 거다. 새로운 행동에 대한 새로운 결과, 예측할 수 없어 두렵지만 그래서 신선하고 재미있는 그 경험을 호기심 있게 살펴보기, 그리고 이 새로운 행동을 위해 용기를 낸 스스로의 결단에 아낌 없는 응원과 따스함을 건네주기.
이러한 부단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생긴대로 살지 않을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