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33
01.
공유 문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던 위워크(wework)가 파산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올해 2분기 손실이 5천억 원을 훌쩍 뛰어넘었고 주가는 작년 대비 85% 넘게 곤두박질쳤기 때문이죠. 그 이면엔 상업용 부동산 시장의 위축, 코로나 기간 동안 직격탄을 맞은 공유 경제의 특수성, 창업자 애덤 뉴먼의 방만한 경영,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손꼽히는 수익 구조의 붕괴 등이 원인으로 언급됩니다.
02.
하지만 브랜드적인 관점에서 wework를 애정 했던 한 사람으로서는 꽤나 이가 시린 소식이었습니다. 브랜딩과 비즈니스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부동산계에도 브랜드가 있을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과 차별화된 모델을 제시한 데는 또 그만큼 일조한 부분이 있는 것이 분명하거든요. 무엇보다 'wework에서 일한다는 건 단순히 자본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빠르게 민첩하고 힙하게 일하기 위해서야'라는 인식을 심어준 탁월한 존재감의 브랜드이기도 했죠.
03.
규모나 업종에 관계없이 하나의 기업이 쇠락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참 마음 아픈 일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뉴스를 잽싸게 공유하며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말들로 예언가 행세를 해대지만 사실 진짜 중요한 지점은 결국 이런 사태들로부터 우리는 어떤 시사점을 발견하고, 어떤 긴장감을 가지며, 어떤 자세로 나와 우리의 일을 들여다봐야 할 것인가겠죠. 그리고 저는 그게 '프로들의 오답노트'라고 생각합니다.
04.
20년쯤 된 얘기인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재수학원에서 모의고사를 본 다음날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수학을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거든요.
"틀린 문제를 잘 정리하는 것만 오답 노트가 아니다. 본인이 맞춘 문제도 다시 한번 풀어보면서 내가 실수할 만한 포인트가 없었는지 재점검하는 것도 오답 노트야. 틀린 뻔 한 건 언제든 틀릴 수 있단 얘기니까."
05.
그리고는 채점할 때 반원을 그리는 방식을 알려주시더군요. 완벽히 이해했고, 실수할 만한 부분도 없다고 생각되는 문제에만 온전한 동그라미를 그리고 조금이라도 애매한 게 있다면 반원을 그리라는 것이었죠. 요즘엔 초등학생들에게 해줘도 잘 먹히지 않을 얘기처럼 들리지만 제게는 꽤 신선한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왜냐면 지금도 저는 이 '반원을 그린다'는 개념을 참 좋아하기 때문이죠.
06.
일을 하다 보면 나에게 좋은 기운이 올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리려면 아주 어려운 과제를 맡더라도 마치 주위에서 나 잘 되라고 으쌰 으쌰 등 떠밀어주는 것 같은 도움을 받게 되고, 진짜 안 풀릴 때는 컵라면에 끓는 물 붓는 정도의 쉬운 일도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시험이야 정답이라도 있고 하물며 교과서나 문제집도 존재하지만 회사 일은 가끔 눈앞의 일을 위해 내가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되어야 하는 순간도 있음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쉽지 않은 영역임이 분명하죠.
07.
하지만 저는 이럴 때마다 온전한 동그라미를 그릴지 아니면 반원을 그리고 넘어갈지 결정하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1년 가까이 일한 저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봐도 정말 모든 것을 내 힘으로, 아무것도 틀리지 않고, 마지막 마무리까지 아주 깔끔하게 끝낸 일이 몇 개인가 세어보라고 하면 열 손가락을 채울 수 있을까 싶거든요. 설사 주목과 칭찬을 받았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일들의 채점표에는 반원은커녕 반의 반원을 그리기도 민망한 일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08.
뭐 겸손을 떨려고 하는 얘긴 아닙니다. 잘 알다시피 우리는 누군가의 반원을 채워주는 역할도 동시에 하니까요. (저라고 뭐 남에게 도움 되는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죠... )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어떤 사안을 바라볼 때 오답노트의 관점으로 다가갈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어떤 대상이 잘나가고, 각광받는 시기엔 그 대세론에 올라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열을 올리고, 반대로 조금이라도 기세가 기울면 '내 뭐라 그랬어. 쟤네들 위험하다 했잖아'라는 결과론을 들이미는 것은 언제든 같은 입장에 놓일 수 있는 우리 프로들 사이의 화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09.
대신 정말 잘나가는 기업이나 브랜드나 상품이나 서비스가 있다면, '저들이 지금 놓치고 있는 것은 뭘까? 저런 결과를 가능하게 만든 것 중에 본인들만의 역량이라고 하기에 애매한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반대로 바닥 모르고 추락하는 대상을 향해서도 '그래도 내가 저들 사이에서 마지막 교훈이라고 여기고 건져낼만한 것은 없을까?'라는 태도를 견지해 보는 거죠. 그래야 우리 역시 스스로를 긴장시키고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더 잘 챙길 수 있을 테니까요.
10.
처음 반원의 개념을 알았을 때는 그저 앞으로 문제를 틀리지 않기 위한 철저한 준비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회사일을 해오며 연차가 쌓이다 보니 이 반원의 나머지를 채워주는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발견하는 것도 참 즐겁고 행복한 일이더라고요. 물론 그중엔 wework처럼 타인의 아픔에서 얻게 된 눈물 자국 선명한 교훈들도 있지만 이 역시 비즈니스 세계의 문법이라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더 이 꽉 깨물고 한자 한자 눌러써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도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도 한 번 묻고 싶어지네요. 여러분은 지금 하고 있는 일 들 중 온전한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는 일이 몇 개나 있으신가요? 혹시 여러 개의 반원을 그리고 계시다면 그 반원은 누가, 어떤 것으로, 어떻게 채워주고 있나요? 어쩌면 이 물음에 대답하는 과정이 프로들이 진짜 제대로 된 오답노트를 써 내려가는 과정이지는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