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34
01.
예전에 김영하 작가님이 토크쇼에 출연해 '호텔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극작가 한 분은 늘 싸구려 모텔에서 글을 쓰는데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머무는 일상의 공간엔 늘 상처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더군요.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파생된 갖가지 걱정들과 냄비때처럼 눌러붙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거기다 집중이라도 좀 해보려고 하면 어김없이 눈에 들어오는 잡다한 집안일들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요소가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02.
대신 호텔 안에 머문다는 건 그런 일상의 상처가 없는 공간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해야 할 것들로 가득 찬 집과는 반대로 하고 싶은 것들로만 이루어진 장소가 바로 호텔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신의 하루를 온전히 호텔에서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때로는 업무를 하더라도 회사나 집이나 카페가 아닌 호텔을 찾아 새로운 감정과 환경 속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03.
다만 결국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서 그 일상을 또 성실히, 지혜롭게 살아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다른 장소, 다른 경험에서 얻어낸 에너지를 익숙한 곳에 들이부어야 하는 숙명을 가진 자들인 거죠.
예전에 한 매체와 짧게 서면 인터뷰를 할 기회를 얻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받았던 질문 중 하나가 '일상 중 가장 좋아하는 때가 언제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네, 솔직히 좀 뻔할 수도 있는 질문이죠.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이 제게는 새로운 관점을 하나 던져준 물음이었습니다. '그럼 가장 좋아하는 일상은 어떤 일상인가요?'
04.
서면 인터뷰였으니 망정이지 즉석에서 답을 해야 하는 대면 인터뷰였다면 분명 맘에 들지 않는 대답을 했을 겁니다. 이 질문 하나만을 남겨둔 채 골똘히 고민을 한 후 마지막 대답을 써서 보냈던 기억이 나거든요.
저는 이 질문이 '포인트'가 아닌 '과정'이자 '사이클'을 생각해 보게 하는 질문이었다고 봅니다. 흔히 우리는 각자가 좋았던 기억을 '순간'에 빗대어서 생각하곤 합니다. 가장 행복했던 과거의 한 토막을 꺼내 단물이 빠질 때까지 곱씹어 이야기하기도 하고, 일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어느 시점 하나를 꺼내 자세히 소개하기도 하니 말이죠. 마치 편집실에 앉아 우리 인생을 플레이해 보다가 '잠깐, 거기 그 부분에서 좀 멈춰봐'하며 정지 버튼을 누르는 것 같기도 하단 생각입니다.
05.
하지만 가끔은 순간이 아닌 꽤 긴 호흡으로 우리가 좋아하는 기억을 꺼내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우선 그 질문에 제가 한 대답을 한 번 소개해 보겠습니다.
"저는 하루 일과를 제 리듬에 맞춰 설계할 수 있을 때가 가장 기분 좋습니다. 휴일을 예로 들면, 오전에 피트니스에서 열심히 운동한 다음 좋아하는 음식들로 점심을 먹으며 여유롭게 오후로 넘어가는 걸 좋아해요. 그런 다음 맘에 드는 공간을 방문해 읽고 싶은 책들을 집중해서 읽다가, 머릿속이 좀 예열(?) 된다 싶으면 이제 제 글을 쓰는 단계로 넘어가곤 합니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으며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를 정리하는 그 순간이 참 기쁘고도 유용하거든요. 오히려 저녁 시간은 조금 열어두는 걸 좋아해요. 하고 싶은 걸 더 하거나, 제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거나, 영화 한 편을 즐기기도 하거든요. 그러니 저는 흡수하고 생산하고, 흡수하고 생산하고를 반복하는 일상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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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 답변을 쓸 때 아주 신난(?) 상태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글로라도 그런 일상의 하루를 되새김질하니 이미 기분이 좋아질 대로 좋아졌던 거겠죠. 근데 진짜로 제가 즐거웠던 이유는 이 질문 하나로 아주 중요한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다름 아닌 '사이클'에 집중했을 때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는 긴호흡의 이점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요.
07.
내가 바라는 일상, 내가 좋아하는 일상을 디테일하게 풀어내보니 그 중간중간에 자리한 걸림돌들이 보인다는 게 참 놀라웠습니다. 아마도 글의 초반에 말씀드렸던 일상의 상처나 흔적들에 해당하는 것들일 수도 있겠죠. 만약 포인트에 집중한 질문을 받았더라면 애써 그 부분들을 생각하지 않은 채 답하려 했겠지만 일상의 사이클 전반을 기획하다 보니 조금은 버거울 수 있는 그것들 역시 끌어안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싫어하는 반찬을 쏙쏙 골라낼 수만은 없다는 걸 알게 된 나이쯤에는 이제 그것들을 어떻게 해야 비교적 현명하게(?) 섭취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08.
또 하나 신기했던 점은 아주 극적인 포인트들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꽤 괜찮은 일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순간이 아닌 과정을 설계할 때는 결국 지치지 않는 동력과 꾸준히 즐길 수 있는 여유에 더 집중을 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오늘만 살고 끝낼 게 아니라면 결국 내일도, 그다음 날도, 그리고 몇 주 후와 몇 개월 뒤도 내가 사랑하는 일상이 유지되어야 하니까요. 그 일상의 사이클 중에서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건 정말 꼭 챙겨야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행복의 마지노선이 보인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습니다.
09.
밀란 쿤데라는 '당신이 과거의 어느 순간을 사랑했다면 자꾸 그 때로 회귀하려 하지 말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 그 순간을 다시 만날 준비를 하라'라고 했습니다. 결이 조금 다른 얘기긴 하지만 저는 결국 그런 행복한 순간들도 우리의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 년 열두 달 여행을 떠나고, 365일 내내 원하는 호텔을 골라 살 수 있는 삶이 아니라면 결국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포인트가 아닌 사이클이 주는 기쁨일 테니 말이죠.
10.
참고로 저와 인터뷰를 진행해 주셨던 기자님께 왜 그 질문을 했는지 조심스레 여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더 인상적인 답변이 돌아왔죠.
"많은 인터뷰이들을 만나지만 모두들 찰나의 순간은 잘 기억하고 잘 설명해요. 근데 어떤 일상을 사랑하느냐,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느냐라고 질문하면 다시 처음부터 고민하기 시작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로서는 그 과정이 있어야 인터뷰이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요. 부분이 아닌 총합의 경험을 듣고 싶은 마음이 크기에 드린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받게 된 제가 행운아라고 느낀 것도 오버는 아니겠다 싶습니다. 좋은 질문은 아주 근본적인 것부터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큰 힘이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