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열문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영 Aug 28. 2023

'나는 왜 일을 미루는가'에 대한 고찰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35

01. 

제목은 이렇게 썼지만 사실 저는 일을 잘 미루는 편은 아닙니다. (재수 없으시죠? 그래도 조금만 더 들어봐 주세요...)  '타고난 성품이 부지런한가?', '성공에 대한 야망이 크거나 독한 성향을 지녔는가?', '시간관리 전문가이거나 효율의 극한을 추구하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에는 절로 고개가 가로 저어집니다. 저는 단연코 그런 타입의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죠.  


02. 

대신 저는 저를 잘 믿지 않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나중의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네요. 

얼마 전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님이 '미루기'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영상을 봤습니다. 흔히 일을 미루는 유형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한 가지는 '쉬기 위해서 미루는 유형' 다른 하나는 '놀기 위해서 미루는 유형'이라고 하더군요.  


03. 

'쉬기 위해서 미루는 유형'이란 마음 같아서는 지금 하고 싶지만 컨디션이 받쳐주지 않는 경우를 뜻한다고 합니다. 생산성으로 보나 효율성으로 보나 현재보다 미래에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고 과감히 미루기를 택하는 것이죠.  

반대로 '쉬기 위해서 미루는 유형'은 조금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조건들이 다 갖춰져 있는 상황에서도 이른바 '하기 싫은 마음이 팽배해진 상태'이죠.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심지어 막상 시작하면 크게 어렵지 않게 빨리 끝낼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차일피일 미룬다는 것은 사실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04. 

이를 두고 뇌과학에서는 '자아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현상'과 '완벽주의' 두 가지에서 답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좀 더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 현상들 위주로 소개 드립니다.) 

첫째는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내일의 나를 믿어보지 뭐'라는 말도 실제로는 '오늘은 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내일은 다를 수 있지'라는 낙관의 기대가 섞인 말입니다. 즉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보다 무조건 더 나은 상태일 것이라는 가정과 내일은 과업을 방해하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상황적인 가정이 합해진 것이죠.  


05. 

하지만 잘 알다시피 '어제 미뤘으니 오늘은 정말이지 상쾌하게 일을 처리해 볼까!'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불안과 긴장은 높아지고 조급한 마음이 발에 채이다보면 갑자기 본인과 극적인 타협을 이루고 기대와 목표를 훅 낮춰 대충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러니 냉정하게 얘기하면 내일의 나를 너무 낙관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오늘의 나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게 더 현명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06. 

만약 그게 어렵다면 어느 정도 비율만 미뤄놓는 것도 방법일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 10이라면 그중에 우선 만만해 보이는 3-4 정도를 오늘 처리하고 나머지를 미래의 나에게 맡겨보는 것이죠. 그럼 과업 전체의 강도를 파악하기도 편하고, 무엇을 먼저 처리하고 무엇을 나중에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감을 잡기도 좋습니다. 더불어 막상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탄력이 붙어 계획한 것 이상의 일처리를 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고요.  


07. 

일을 미루게 되는 두 번째 이유는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큰 나머지 지나친 완벽주의에 집착하는 마음가짐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기엔 뭔가 준비가 잘 안되어있는 것 같고 왠지 조금 더 고민을 해야 좋은 대안이 나올 거라는 생각에 일을 시작하는 시점을 계속 미루는 것이죠.  

솔직히 말하면 저도 때로는 이런 마음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 때가 있습니다. 기획 일을 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직 나 스스로가 확신하지 못한 아이디어들, 충분히 숙성을 거치지 못해 날 것 그대로의 초안들은 선뜻 추진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거든요.  


08. 

그러나 이 역시도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의 나'를 너무 믿는 케이스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반드시 지금보다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미루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데드라인의 데드라인'을 만들곤 합니다. 다시 말해 일을 끝내야 하는 데드라인이 있다면 적어도 그전에 저만의 데드라인을 앞당겨 만들어 보는 거죠. 이건 일을 나눠서 중간 점검을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진짜로 데드라인이 더 빨리 오도록 만드는 것이니까요.  대신 그 퀄리티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을 달아두고 진행합니다. 다른 글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던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초안부터 만든다'는 결심이 여기서 파생된 거라고도 할 수 있죠.  


09.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는 말이 쿨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지만 그 쿨함이 내일의 우리를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같은 이유로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허술할 뻔했던 것들이 알아서 완결성을 갖춰가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재의 나'를 믿고 우선은 시작해 보는 것뿐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뤄서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내일의 나도 예측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10. 

아마 '저는 똥줄(?)이 타야 더 집중력이 생겨요'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 말에 일부분 동의가 됩니다. 다만 그 순간에 생기는 집중력이란 게 정말 일을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신력과 체력이 혼합된 수행능력인지, 아니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로 범위를 확 줄인 채 좁은 시야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것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후자라면 결국 우리는 또 타이밍의 싸움에서 진 건지도 모릅니다. 하루하루 내가 어떤 상황과 컨디션일지 예측할 수 없는데, 그 확률을 버리고 버려서 마지막 날 단 하루에 거는 건 너무 위험한 도박이 아닐까요? 그러니 여러분 스스로 쥘 수 있는 패를 여러 개 만들어 놓는다는 생각으로 미루는 습관과 조금씩 멀어지는 게 현명한 태도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