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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Aug 31. 2023

생각의 '기초대사량'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37

01. 

'상상하다'의 상상(想像)은 재미있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 코끼리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중국 사람들이 인도로부터 들여온 코끼리의 뼈만을 가지고 코끼리가 어떤 동물일지 형상을 유추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거든요.  그래서 상상의 한자어 역시 '생각 상(想)'자에 '모양 상(像)'자를 결합해서 쓰고 있고 특히 이 '모양 상'자에는 코끼리 '상(象)'자가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어떤 모양일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이 곧 상상이자 이런 중요한 능력을 우리는 상상력이라고 부르고 있죠.  


02. 

천재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이 상상력에서 찾았습니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모두 찰나의 순간인데 그 앞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설사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그건 제가 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과는 다른 것이죠. 그래서 저는 그 이야기를 실감 나게 상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제 머릿속에 펼쳐진 그 세계를 다른 사람도 상상해 볼 수 있도록 글로 푸는 거죠. 그게 저의 본분입니다."  


03. 

저는 브랜딩을 하는 사람이고, 제가 속한 영역은 예술의 영역은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상상하고 구현할 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닌 만큼 다른 사람들과 싱크를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죠.  그런데 예술과 같은 창작 분야와 주된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얼마나 실감 나게 상상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걸 다른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해줄 정도로 잘 풀어낼 수 있는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제 머릿속에 떠오른 이 '상(像)'을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 잘 넣어주고 펼쳐주는 능력이 필요한 거죠.  


04. 하지만 이 능력이 결코 쉽게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설사 내가 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함부로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닌 만큼 모두가 똑같은 경험과 생각의 스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니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전달할 때는 반드시 상대방이 어느 정도의 상상을 할 수 있는지를 배려하며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걸 '생각의 기초대사량'이라고 표현하곤 하죠.  


05. 

잘 아시다시피 기초대사량이란 우리 몸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말합니다. 호흡도 하고 체온도 유지하고 각종 장기들의 기능도 도우며 몸 곳곳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각자가 상상을 하는 과정에서도 이 기초대사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저마다 자신의 상상을 생동감 있게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각 에너지가 있는 셈이죠. 그래서 '이해'의 문제가 아닌 '공감'과 '합의'의 영역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듣는 사람이 얼마만큼의 생각의 기초대사량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봅니다.  


06. 

'아니 그걸 어떻게 예측해요?'라고 물으면 저도 뾰족한 대안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상대의 생생한 상상을 위해 어느 정도 노력해 보았냐는 또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겠죠. 과거 코끼리 뼈를 보여주고 코끼리를 떠올려 보라고 했을 때, 그냥 '코끼리란 놈의 뼈가 이마만큼 커요'라고 설명한 사람이 있나 하면, 코끼리 뼈를 하나하나 바닥에 펼쳐 놓고 부족한 부분은 직접 그리거나 다른 것을 빗대가며 코끼리의 특성과 모양새를 실감 나게 연출한 사람이 있을 테니 말이죠. 그러니 여기서부터는 각자의 노력이 역량으로 작동하는 순간이 됩니다.  


07. 

저는 그 핵심이 은유와 비유일 수도 있단 생각을 합니다. 

그 옛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는 천재의 표상'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특히 ⟪시학⟫에서는 '어떤 것에 다른 낯선 무엇을 담아 상대를 이해시키는 것은 가장 이상적인 설득이다'라며 '비유'에 관해 극찬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 은유와 비유의 핵심은 상대방의 생각의 기초대사량을 잘 가늠하며 사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아는 분 중 한 분은 모든 업무를 은유와 비유를 통해서만 설명합니다. 나중에 가서는 내가 이분과 업무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인지 캐치마인드를 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죠. 그런데도 본인은 스스로 아주 효과적이고 매력적이게 설명했다고 생각하며 자기만족을 합니다. 정말 안타까움과 분노가 함께 이는 순간이죠.  


08. 

저 역시 은유와 비유를 사랑하지만 이건 마치 코끼리 뼈의 부족한 부분을 효과적으로 채우기 위해 결정구 하나를 던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나와 상대의 에너지를 모두 고려해 아끼고 아꼈던 필살기를 꺼내는 셈이죠. 그렇지 않으면 상대는 내가 먼저 멋대로 떠올린 것을 쫓아오느라 기진맥진하게 되고 겨우 상상한 것들도 오래 유지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생동감 있고 현실감 있는 상상 역시 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09. 

예전에 존경하는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무례한 사람들은 함부로 말하지만, 오만한 사람들은 멋대로 말한다."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그 말이 소름 끼치게 잘 이해되더군요. 예의 없는 사람들은 이말 저말 가리지 않고 막 던지고 보는 반면, 오만한 사람들은 자기도취해 취해 타인의 기초대사량을 생각지 않고 혼자서 먼 길을 떠나버린다는 의미였습니다. 그 깨달음을 얻은 순간엔 저의 커뮤니케이션도 뒤돌아보게 되더군요.  


10. 

세상이 아무리 좋아지고 AI가 우리의 생각을 대신하는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저는 상상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나의 상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심어주기 위해 여러 기술의 도움을 얻을 수는 있어도 그 태도와 배려의 가치는 여전히 '나하기 나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동물이고 그 상상을 전파하는 것을 사랑하며, 이를 정확하고 매력적으로 하는 사람이 늘 인정받는 법이니 말이죠. 

그러니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뭔가를 상상하게 할 때는 그 사람의 생각의 기초대사량을 한 번 가늠해 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그게 어렵다면 중간중간 직접 체크해 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나요?'라는 그 한 마디 만으로도 우리는 타인과의 걸음을 맞춰가며 잘 대화할 수 있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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