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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Nov 30. 2023

다작(多作)이 주는 기쁨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57

01 . 

며칠 전 그라운드 시소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루이스 멘도(Luis Mendo)'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몇 해 전 우연히 알게 된 작가인데 제가 참 좋아하는 색감과 그림체를 가지고 있어서 금방 빠져들었던 기억입니다. 그림에 큰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취향에 맞는 그림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때면 자석에 옮겨붙는 철가루처럼 작품을 향해 모든 관심이 집중되곤 하니까요.


02 . 

루이스 멘도가 디지털로 그림을 그린다는 건 어디선가 들어서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지만 오직 아이패드를 가지고만 작품을 완성한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본인은 작업용, 스케치용, 독서용 등 3가지의 아이패드를 가지고 있고 늘 이 기기들 사이를 옮겨 다니며 작품 활동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 이 과정을 보다 보면 '와, 어떻게 이런 대단한 작품들을 그릴 수 있지?'라는 생각보다 '솔직히.. 좀 연습하면..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 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실제로 펜을 들고 그림을 그려보기 시작하면 금방 현실을 깨닫겠지만요.


03 . 

대신 제가 느낀 경이로움은 좀 다른 포인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멘도는 업계에서도 알아주는 엄청난 다작(多作) 작가입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간단히 식사를 하고, 책상에 앉아 어제 자기 전에 읽다만 책을 조금 더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하는데요, 이 루틴이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온전히 작품을 그리는 것으로 종일의 시간을 채워간다고 합니다. 집에서도 그리고, 밖에 나가서도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도 그리고, 거리에 서서도 지나가는 사물들의 찰나를 포착해 끊임없이 그리는 거죠. 그렇게 그리는 그림이 자그마치 하루 20개 정도에 달한다고 합니다.


04 . 

사실 아무리 드로잉 일러스트라고 해도 하루에 몇 십 개가 되는 작품을 그린다는 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작업량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전적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도 본인의 세계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데 그 역시 특출한 능력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을 대하는 태도와 엮어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 외에는 특별한 취미조차 없고, 주변의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고, 슬럼프가 찾아올 때도 그걸 무시하고 계속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죠.


05 .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저는 최근 들어서 '항상성'이라는 개념을 자주 떠올립니다. 꾸준함이라던가 지속가능함이라던가 회복탄력성 뭐 이런 것과는 결이 또 다른 의미인 이 항상성은, 주변 환경에 의해서 안정적인 조건이 깨지더라도 이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나름의 안정을 꾀하는 걸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주변이 요동치더라도 나는 나의 최적 조건을 맞추며 살겠다는 평형의 의지치인 셈이죠.


06 . 

이 개념을 떠올린 것은 다작(多作)의 조건을 생각하면서부터였습니다. 

저는 다작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데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단 나의 할 일을 한다'는 그 애티튜트에 매료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걸출한 작품 하나를 잘 뽑아내는 사람들이 신기하고 부러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는 자기 할 일을 꾸준히 잘 하면서도 그 결과물에 만든 이의 평정심이 묻어나는 것들이 더 대단해 보이더라고요. 어느 날 꿈속에서 계시처럼 영감을 받았다는 사람보다 한자리에 서서 몇 시간 동안 같은 장면을 바라봤다는 사람이 더 존경스럽기도 하고요.


07 . 

부끄럽지만 저도 글을 쓰다 보니 이 다작에 대한 애착이 참 큽니다. (애착이 크다고 했을 뿐입니다... 실제 다작을 하고 있다거나... 작품의 퀄리티가 특출나다고는 안 했습니다... 암튼) 글은 그림과 또 달라서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들리는 것을 나만의 언어로 바꾸어 묘사하고 전달하는 재미가 있는 영역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항상성을 유지하면서 계속 일정한 결과물을 뽑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활동이더라고요.


08 . 

그러다 생긴 버릇 중 하나는 글쓰기를 '정밀 묘사'처럼 생각해 보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미술 학원을 잠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원장 선생님께서 '정물화를 그려야 하니 매번 자기가 그리고 싶은 사물 하나를 들고 오라'는 미션을 주셨거든요. 그래서 학원을 가는 날이면 오늘은 뭘 손에 쥐고 가야 하나 고민을 했었는데 지금은 마치 글쓰기의 소재를 그런 느낌으로 찾고 있는 겁니다. 다작을 위해서 일단 그날그날 떠오르는 생각들을 일단 한 손에 꽉 쥔 채로 하루를 살아보는 거죠.


09 . 

그렇게 생각하니 이 다작이라는 것도 독함에 가까운 성실함이나 일중독에 가까운 생산성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주변에 어떤 유혹이나 갈등이 있더라도 '지금 내 손에 들린 것은 이게 전부니 오늘은 이게 내 요리의 메인 메뉴다'라는 항상성을 유지하는 자세에서 비롯되는 게 더 크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리고 이런 태도가 주는 기쁨은 매일 달리기를 하거나 매일 건강한 한 끼를 먹는 것처럼 기분 좋은 상태를 오래 간직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10 . 

흔히 다작은 질이 아닌 양으로 승부하는 세계일 거라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다작이야말로 양으로부터 질을 확보하는 세계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 문구인데 '질은 양을 보장하지 못하지만, 양은 질을 보장할 수도 있다'는 말이 딱 적절한 예인 것 같더라고요. 일정한 생산량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다면 결국 나의 모든 것이 좋은 항상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니까요, 다작이 주는 이로움은 한두 가지가 아닌 거죠. 그러니 여러분도 혹시 뭔가를 잘하고 싶다면 일단 다작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는 게 어떨까 싶어요. 그렇게 완성된 항상성이 여러분을 또 다른 퀄리티의 세계로 안내할 수도 있는 거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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