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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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지 제 주위엔 늘 책을 선물해 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죠.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그 마음을 실제로 표현해 주는 사람들께는 작지 않은 감동이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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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작이 언제였을까 생각하니 회사 생활을 시작할 때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더라고요. 그때 저의 팀장님이셨던 분께서 늘 연말연시에 개인 면담을 할 시기가 다가오면 팀원들께 책을 한 권 선물하며 이야기를 풀어가주셨거든요. 당시엔 좋아하는 책을 받는다는 기쁨이 앞섰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대화를 편안하게 이끌어가기 위한 일종의 장치 역할도 했다고 생각됩니다.
'왜 이 책을 골랐는지'에 대한 이유를 시작으로 '요즘엔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에 대한 근황 토크를 이어가다가 '올 한 해는 어떻게 보냈고 내년에는 무엇을 또 해볼 수 있을지'에 관한 주제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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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건 이렇게 연말연시 즈음 책을 주고받는 문화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포지션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때 친하게 지냈던 분들을 만나면 가끔 서로 책 선물을 하면서 대놓고 하기엔 좀 부끄러운(?) 응원을 할 때도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몇 해 전부터는 친하게 지내는 동료나 후배들에게 1년에 한 번쯤은 책 선물을 하며 그동안 미뤄왔던 이야기를 해보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친한 후배와는 이런 얘기를 나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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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님. 네이밍 하는 거 좋아하시니까 이렇게 연말연시에 책 주고받으며 티타임 하는 것도 하나 네이밍 해주세요."
"그러게요. 뭐가 좋을까요. 책으로 하는 커피챗이니 '커피책'으로 할까요?"
"그건 뭔가 커피를 다루는 책같이도 들리는데 딴 건 없을까요?"
(왜 또 굳이 내게 일 하나를 얹어주는 걸까.. 하는 생각을 잠시나마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책챗'은요? 생각해 보니 서로 발음이 비슷하네요 책과 Chat ! ㅎㅎ"
"오 좋아요! 뭔가 북챗보다 더 흥미롭고 재미있어요. 입에도 딱 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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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또 사적인 숙제 하나를 끝냈구나 싶었는데 곱씹어 보니 나름 그 대화가 재미있게 느껴지더라고요. 사실 저도 한때 책 선물이 참 힘들었습니다. 무슨 책을 선물해야 할까는 둘째치고 저 사람이 책을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도 구분이 안 갔거든요. 그러니 괜히 부담감이나 의무감을 지워주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어떤 사람을 보고 떠오르는 책이 있어도 그냥 혼자서 생각하다 말아버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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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는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주는 것은 내 자유, 읽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정말 편하더라고요. 이게 뭐 음식처럼 안 먹으면 썩는 것도 아니고, 혹시 본인 취향에 안 맞으면 다른 누군가를 줘도 되고, 집에 두기조차 싫으면 중고서점에 팔아도 그만이니 일단 주고나 보자라는 생각이 든 거죠. 그러다 보니 책의 내지에 코멘트를 적는 대신 오히려 가벼운 엽서를 써주거나 아니면 만나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책을 주는 게 훨씬 나았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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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어엿한(?) 이름도 하나 갖게 되었으니 나름의 뿌듯함이 생기더라고요. 물론 이 글을 보고서 '연말연시에 책 한 권 선물하는 게 뭐 그리 대수냐'라고 할 분도 계시겠지만, 그걸 직접 실행한다는 것과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그래도 매년 꾸준히 하려 한다는 것, 더불어 그 행위에 누구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저는 네이밍 하나 얹어봤다는 게 남다른 기억 하나쯤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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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남은 연말에는 친한 후배나 동료와 30분이라도 잠깐 티타임을 하면서 '책챗'을 해보고자 슬슬 약속을 잡고 있습니다. (신기하죠...? 저도 선배들로부터 책을 선물받아 그런지 후배들에게 책 선물을 더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선배들을 미워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암튼)
예전에는 꽤 고민을 하다 한 권을 고르고 주저리주저리 변명처럼 이유를 설명하다 책 선물을 했는데 지금은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선택합니다. 왜냐면 내년에도 그 사람과는 연례행사처럼 계속 책챗이 이어질 확률이 크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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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형 인간인 저는 송년회도 별로 안 좋아하고 연말연시 술자리도 별로 안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해의 감사함을 전하고 새해의 좋은 기운을 선물하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거든요. 세상엔 술 말고도 서로 교감할 수 있는 매개체가 많고 각 잡고 자리 만들지 않아도 응원할 수 있는 방법이 많으니까요, 여러분도 올해는 '책챗'에 한 번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라고 아주 작은 권유를 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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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책 고르는 것도 일인데...' 싶은 분들을 위해 재미난 팁을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굳이 서점에 가서 매대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아도 선물하고 싶은 사람을 떠올렸을 때 그에게 따라붙는 키워드로 책을 검색해 봐도 좋습니다. 그럼 친절한 인터넷 서점이 '세상에 이런 책도 있구나!'하는 결과물을 한 아름 선물해 주거든요. 그 결과물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조금씩 관심도를 좁혀가다 보면 때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꼭 맞는 책을, 때론 그 사람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물할 수 있는 의외의 책을 택할 수 있으니 너무 겁먹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책이란 게 별건가요. 생각해 보면 그저 '책 한 권'인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