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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Dec 20. 2023

우리들의 엔딩 크레디트

일이 나에게 영향을 주듯 나도 내 일에 작은 선 하나는 그을 수 있으니까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10년하고도 두 해가 더 지났습니다. 가끔 회사 동기들과 '강산 한 번이 변하고도 남는 세월을 회사에 바쳤다'라고 농담반 진담반의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의외로 저는 회사에서의 시간이 늘어갈수록 더 담담한 마음이 커지더라고요. 가끔씩은 내가 타성에 젖어있는 건 아닐까 하는 괜한 두려움도 생기고 타고날 때부터 도전에 대한 DNA가 없을 수도 있다며 출생의 비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보지만 딱히 그렇달만한 단서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땐 많아도 아직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흥미를 잃거나 무기력해지는 경험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어떻게 한 회사에서 10년을 넘게 일하세요?'라는 말이 일상 인사처럼 들려오던 어느날 친구 녀석에게 문자 한 통이 날아들었습니다. 사연인 즉슨, 회사에서 연말 송년회 겸 워크샵을 하던 도중 동료들끼리 서로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본인이 받은 질문에 대해 아무 대답도 못하고 우물쭈물대다 자기 순서가 끝나버렸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뭐 얼마나 어렵고 난처한 질문을 받았길래 그랬냐고 묻자 돌아오는 답장은 생각보다 단순했습니다.


'과장님은 이 일을 안하셨으면 어떤 일을 하셨을 것 같아요?'

세상에 이 물음에 답을 못했다니 제가 다 속이 상하더라고요. 새해 목표나 앞으로의 꿈을 묻는 것도 아니고 본인만 알고 있는 프라이버시를 캐내는 질문도 아니니 말이죠. 그래서 그냥 어렸을적 장래희망이나 지금이라도 도전해보고 싶은 거 아무거나 말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열심히 핀잔을 주고 있었는데 새로운 질문 하나가 제 앞에 떨어졌습니다. 


"사실 무슨 일을 했을까가 궁금했다기 보다는 이 일이 아닌 다른 직업을 택했어도 내가 여전히 비슷한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니 또 고민이 되더라. 다른 일을 했어도 지금과 비슷한 삶을 사는 게 다행인 건지 아니면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져야 다행인 건지 말야. 그래서 너한테라도 물어보고 싶었어."


질문한 분 민망하게 왜 그런 고민까지 하냐는 말로 그 순간을 얼렁뚱땅 넘어가긴 했지만 제게도 이 질문은 생각할 거리를 남겨놓았습니다. 며칠동안은 사람을 만날때마다 저 사람은 저 일을 안했으면 무슨 일을 했을까라는 호기심과 함께 만약 그랬다면 저 사람의 인생은 드라마틱하게 달라졌을까 아니면 비슷한 인생이 이어졌을까를 상상하게 되었거든요.




"86페이지부터 176페이지까지 먼저 읽어봐."

친구 녀석에게 내민 책은 번역가 황석희 님이 쓰신 에세이 ⟪번역 : 황석희⟫였습니다. 갑자기 왠 책이냐며 뜬금 없는 표정을 짓는 친구에게 이런 말로 부연 설명을 시작했죠. 


"이거 읽고나서 너도 한 번 생각해보라고. 네 직업 얘기로 에세이 한 권을 쓴다치면 너는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야. 일단 우리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나름 중간 정리를 할 수 있어야 현재와 비슷한 삶은 뭐고 전혀 다른 삶은 뭔지 알 거 아냐."

"그래도... 번역가는 너무 쌩뚱맞은데..."


얇고 가벼운 책이고, 어려운 내용이란 눈씻고 찾아도 발견할 수 없으니 인생 독서 목록에 한 줄 더 추가한다는 생각으로 펼쳐보라며 잔뜩 달래놓고 돌아선 기억이 납니다. 


⟪번역 : 황석희⟫는 '데드풀', '아바타'등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번역하며 역대급 명대사들을 탄생시킨 황석희 번역가님의 직업 이야기이자 일상 이야기가 담긴 글입니다. 기획 일을 하는 저로서는 늘 타인의 요구를 받아들여 또 다른 타인에게 결과물을 전달하는 그 중간자의 입장에서 수많은 것들을 만들고, 고치고, 업데이트 하는 일을 반복하기 때문에 제 직업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직업을 고르라고 하면 어김없이 '번역가'라고 대답하거든요. 때문에 황석희 님의 책이 나온다는 소문을 들을 때부터 너무도 기대하며 기다렸고 마침내 표지에 얹힌 제목을 보자마자 이내 '와'하고 얕고 짧은 탄성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죠. 거기엔 마치 영화가 모두 끝난 다음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의 한줄 문구 처럼 자신의 일과 자신의 이름으로만 구성된 제목이 있었으니까요.


아주 가끔 사회 초년생 후배들이나 대학생 독자분들로부터 아직도 본인이 무슨 일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 질문에 제가 답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라는 말이 목구멍을 타고 오르지만 일단은 꾹꾹 놀러 담은채 그 답은 본인만이 안다며 원론적인 대답으로 둘러댄 적이 많았죠. 

그런데 어느날부터는 조금 용기를 내어 이런 제안을 해보곤 합니다. 


"만약 영화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본인이 어떤 직무에 가장 어울릴 것 같으신가요? 기획도 있고 배급도 있고 촬영도 있고... 시나리오를 쓸 수도 있고, 소품을 담당할 수도 있고, 캐스팅에 일가견이 있을 수도 있겠죠. 아니면 아예 직접 연기를 하거나 감독을 하는 편이 더 잘 맞을 수도 있고요. 

어쩌면 세상일도 비슷하고 회사 안에서도 다를 바 없는 것 같아요. 모두가 멋진 영화 한 편 만들기 위해서 각자의 역할을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해내고 있거든요. 그러니 때론 다른 직업에 나를 대입해보며 그 때 펼쳐질 하루하루를 열심히 상상해보는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확신으로 바뀌어가기도 합니다. 

⟪번역 : 황석희⟫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번역가와 닮아있구나'하는 것과 '나는 진짜 번역가의 세계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채 장님 코끼리 만지듯 번역을 입에 올리고 있었구나'하는 것이었죠. 번역가가 말해주는 번역의 세계란 복잡한 비즈니스로 얽혀있는 세계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영화에 대한 이해보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해가 먼저 수반되어야 하는 세계이기도 했거든요. 그러니 누군가 외국어 하나에 꽤 능통한 친구에게 '너도 번역가 한 번 해봐. 영어도 잘하고 영화도 좋아하잖아.'라고 말하면 황석희 님과 같은 번역가들이 스크린을 찢고 나와 성을 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타인이 보는 나와 내가 아는 내가 다르듯이 타인이 규정하는 직업과 그 일을 밥벌이로, 꽤 오래, 나름 잘해내야 하는 입장에 선 사람이 이야기하는 직업은 큰 차이를 보일테니 말이죠.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어쩌면 영화 번역가는 대사의 전달자가 아니라 대사에서 풍기는 늬앙스의 냄새를 판별해서 전달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p.176)

그러게요. 영화 번역가라는 일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곧 20년안에 사라질 대표적인 직업으로 분류되지만 (석희 번역가님... 죄송합니다...) 한편으론 그리 쉽게 사라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 역시 그 일을 해 본 사람만이 이해하는 업의 본질, 관계적 특성, 경험의 맛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번역가라는 직업을 대사의 전달자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 실제 그 일을 하는 누군가는 늬앙스의 냄새를 판별하고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고 있다는 거죠. 저는 이렇게 자신의 직업을 자신의 언어로 한 번 더 번역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그 일을 잘 해내고 있는 존재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열흘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친구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다행히 취향에 잘 맞는 책이었는지 오히려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 조금씩 집중해서 읽었다고 했고 책 속에 등장하는 영화 몇 편도 찾아봤다고 했죠. 여전히 동료의 질문에는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지만 지금은 딱히 그 질문에 신경을 쏟지 않게 되었다는 말도 전했습니다. 그건 질문을 부정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고민으로의 접근이었고 어쩌면 그 물음에 더 나은 대답을 할 수 있는 용기와도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번역가로 활동하는 얘기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딸 아이 얘기, 주변 사람들에 대한 얘기, 작은 직업병들에 대한 얘기,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얘기들이 담겨 있어서 훨씬 좋더라. 내가 다른 직업을 가진다고 상상했을땐 그냥 나라는 사람에만 집중해서 고민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을 따라가다보니 오히려 나와 엮여있는 사람들, 사건들이 훨씬 많이 떠올랐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디까지 영향을 줄 수 있고 또 어디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됐달까?"


딱히 감성적인 녀석도 아닌데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렀다는게 놀랍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저 역시도 미처 책을 읽을때 발견하지 못한 또 하나의 관점을 얻게 되었죠. 여태껏 매일 업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혹은 영향만을 생각하고 살았다면 가끔은 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주게 되는 영향력을 살펴볼 필요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만약 내가 웹툰 작가라면, 여행 가이드라면, 요리사라면, 음악가라면... 그럼 아마도 제가 조카에게 장난처럼 건네는 말 한마디의 늬앙스나 화법이 눈에 띄게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죠. '다른 직업을 선택했으면 다른 삶을 살았을까'라는 질문은 돈을 얼마나 더 벌고, 어떤 경험들을 하고, 무슨 평판을 가지게 되었을까라는 것 못지 않게 내 삶의 아주 작은 부분들이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다른 사람의 직업 세계를 들여다보는 걸 참 좋아합니다. 단순하게는 그 직업을 잠시나마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인 것 같고 조금 심오하게 표현하자면 그 직업이 그 사람에게 준 영향과 그 사람이 그 직업에 끼친 영향을 교차해서 가늠해보는 게 흥미로워서 인 것도 같아요. 

호떡을 구우시는 할머니께서 '내가 지금까지 몇 십만장은 족히 구웠을텐데 지금도 호떡 하나가 예쁘게 완성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라는 말을 하실때면 할머니에게는 호떡이 자식 같은 존재일 수 있겠다싶고, 동물사육사로 일한 경험이 있다는 후배가 '지금도 그 동물들이 어딘가에서 잘 먹고 씩씩하게 자라고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을 할 때면 저 친구가 사육사로 일해서 동물들은 참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직업의 세계관이 나의 세계관을 만들듯이 나의 세계관도 그 직업의 세계관에 작은 선 하나쯤 그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면 일과 사람의 관계가 새삼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번역에 영향을 주고 번역이 영화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말이죠.


가끔 영화를 보러가면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영화의 감흥을 마지막까지 즐기려는 찐 영화팬인가보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요즘엔 저 크레딧에 담긴 누군가는 아닐까라는 상상도 해봅니다. 1초만 등장하고 사라지는 보조 출연자일지도 모르고 해당 영화에 큰 돈을 투자한 투자자 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분야와 역할을 떠나서 왠지 그 분이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되더라고요. 영화 한 편을 마무리하는 저만의 재미 요소가 하나 더 생긴 거죠. 


그리고 이 책을 만나고나서는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치 ⟪번역 : 황석희⟫처럼 ⟪기획 : 김도영⟫ 같은 크레딧이 붙는다면, 내가하는 일과 내 이름이 나란한 비율로 놓여있는 순간과 만난다면 그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고 또 어떤 모습일까 하고 말이죠. 어쩌면 두 단어 사이를 자기 나름의 번역으로 매꾸어가고 있는 삶이야말로 자신의 일과 자신의 존재를 잘 가꾸고 있는 삶일지 모른단 결론에 이를때면 그 둘의 밸런스가 적당히 잘 맞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보게도 됩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짓누르지 않는,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언젠가 이별할 지 몰라도 상대를 떠올리면 기분 좋은 기억이 가득할 수 있는 상태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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