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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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칼럼을 읽다가 의미심장한 표현 하나와 마주쳤습니다. 요약하자면 '오늘날에는 소통의 부재와 소통의 과잉만 있을 뿐 중용의 밸런스를 잡는 사람 만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는 것'이었죠. 앞뒤 맥락을 떼어 놓고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같지만 저도 이 의견에 제법 동의가 되었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를 놓고 봐도 '말 시키지 마세요' 아니면 '제발 내 말 좀 들어주세요' 둘 중 하나의 화법을 취하는 스탠스가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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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오늘은 소통의 과잉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사실 소통의 부재라는 이야기는 흔히 들을 수 있지만 '소통 과잉'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표현은 아닙니다. 게다가 늘 소통이 부족했을 때 나타나는 단점들 위주로 설명할 뿐 소통이 과해졌을 때 드러나는 문제점은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심지어 어떤 조직이든 '차라리 오버 커뮤니케이션이 낫다'는 문화가 팽배해져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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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색다른 에피소드를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예전에 가족 간의 불화(?)를 진단하고 컨설팅해 주는 프로그램에서 이른바 '대화 단절 가족'의 사례를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가족의 일상을 모니터링한 영상을 보여줬는데 제가 봐도 좀 심각하다고 할 정도로 대화 빈도가 낮아 보이더군요. 밥 먹을 때는 물론이고 집에 돌아온 식구를 맞이할 때, 누군가 자신의 외출 사실을 알릴 때, 심지어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도 큰 대화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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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 집은 정말 심각하구나...'하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쯤 반전에 가까운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막내아들이 새로 살 자전거에 대한 주제를 툭 하고 꺼내자 가족들이 슬금슬금 거실로 모이더니 하나둘씩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며 마치 가족회의를 하듯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었죠. 심지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화기애애하고 다정한 분위기가 이어졌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진지하게 대화에 참여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저도 계속 영상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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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의 설명은 이랬습니다. '저 가족은 기본적으로 모든 구성원이 불필요한 대화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싫어하는 집단이다. 다만 대화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고 만약 누군가 '의제'를 하나 띄우면 진지하게 대화에 참여한다는 일종의 룰을 가지고 있는 거다. 대화 빈도가 더 많아지면 좋겠지만 그걸 강요할 수는 없다. 지금 저 가족은 최적의 밸런스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족 인터뷰에서도 가족들은 대화의 부재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어떤 일이 있을 때도 가족들과 가장 먼저 소통하고 구성원들 사이에 사랑한다는 표현도 자주 한다는 직접 증언들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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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한 예를 들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소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가족만 해도 각자가 가진 소통의 의지치와 에너지가 다 다른데 사회에서 만나는 사이라면 이는 더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죠.
물론 대화를 먼저 이끌어가려고 하고 사람들과 더 많은 소통을 하는 사람들이 나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제가 문제시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야 그게 솔직하다고 믿는 사람,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끄집어내야 소통에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들에 국한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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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면서 새삼 그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답답하다'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누군가 '답답하다'고 하면 얼른 내가 뭔가를 도와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저 역시 안절부절못할 때가 있었지만 요즘은 그 답답함이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 유심히 관찰할 때가 많거든요. 그중엔 그저 자기가 가진 말을 모두 내뱉지 못해서, 타인으로부터 자기가 듣고 싶은 답을 듣지 못해서 답답하다고 표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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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불과합니다. 제가 가장 주의하는 사람들의 유형 중에는 유독 말하는 습관이 본인 위주로 형성된 사람들이 많은데요, '제가 좀 필터 없이 말하는 편이에요'라든가 '직설적이긴 하지만 악의는 없어요'라든가 '제가 궁금한 걸 못 참아서요'라는 스타일의 사람들을 만나면 '아, 저 사람은 일단 소통의 전제가 자신에게 맞춰져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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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진짜 제대로 된 소통을 하고 싶다면 매번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쏟아내거나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려는 대신 '상대가 언제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나'를 세팅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통해 상대방 역시 '저 사람이 말할 때는 내가 더 귀 기울이고 들어줘야지'라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게 중요하죠. 소통이란 결국 어떤 대상과의 상호작용이란 걸 상기해 본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대상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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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가끔은 '답답하다'는 말을 내뱉기 전에 한 번쯤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가 타인의 공간에 함부로 불쑥 들어간 다음 '하도 밖으로 안 나오셔서 답답한 마음에 제가 그냥 들어갔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듯이 누군가와의 소통을 위한다면 서로 합의된 장소까지 사람을 편히 안내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갖추는 것이 현명할 테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