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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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하는 이야기치고는 조금 무거운 주제일까 싶어서 걱정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기분 좋게 으쌰으쌰 하는 덕담을 주고받고 새해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게 연말연시에 걸맞는(?) 그림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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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 년을 돌아보는 과정에서는 '올 한 해 참 열심히 살았다'는 그 마음과 더불어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게 맞나?' 혹은 '정말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인가?'라는 생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다는 것을 많이들 공감하실 겁니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그런 걱정들을 하나둘씩 주워 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걷는 길은 현재 소속되어 있는 곳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타이밍이라면 이런 결심에 더 용기가 불붙기도 하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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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비슷한 고민이 지속된다면 상황을 바꾸는 게 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혼자서의 힘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들이 존재하고 설사 변화의 바람을 불어 넣는다고 해도 그 효과가 미미하다면 아예 새로운 판에 나를 던져보는 것도 정말 훌륭한 시도거든요. 무턱대고 '팀을 옮겨보세요', '퇴사만이 살길입니다'라는 무책임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그래도 길이 있을 거다', '일단 좀 더 버텨보면서 기회를 엿보자'는 말이 더 무책임하고 가혹한 피드백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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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맞다'는 말에 동의가 되는 부분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물론 이 표현이 떠나는 사람에게 좀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떠나기로 결심한 모든 사람들이 '아 저는 여기랑 안 맞네요. 남은 님들끼리 잘해보세요. 저는 이 세계를 떠나 새로운 세상에서 시작해 보렵니다'라는 마음을 먹는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그 밉고 미운 절을 조금이라도 더 사랑해 볼 수 있는 포인트를 찾으려 애쓰다 마지막 에너지까지 소모한 상태로 떠나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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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절을 떠나기 전에 절이 싫은 이유를 조금 더 명확히 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표현이 좀 웃기긴 하지만) 절이 돌아가는 시스템이 싫은 건지, 이 절에서는 더 이상 성장하기가 힘들다고 느껴지는 것인지, 다른 절에 비해 이 절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건지 혹은 절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절에 있는 누군가로 인해 너무 큰 부침을 겪고 있는 것인지, 절과 나의 관계 상태를 비교적 뚜렷하게 정의할 수 있어야 떠날 때도 미련이 남지 않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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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야구선수가 소속팀을 떠나 새로운 팀에 오게 된 상세한 사연을 공개해 사람들로 하여금 큰 관심을 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본인은 여전히 원 소속팀에 애정이 넘쳐 해외 생활을 마치고도 1순위로 접촉해 협상하려 했지만 구단이 보여준 태도와 오해할 만한 보도자료를 묵인한 사실에 실망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팀을 떠났다는 것이었죠. 이 정도면 단순히 '절이 싫어 떠난다'는 그 말로 해석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 안에 담긴 사정은 본인만이 알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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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복잡한 상황은 저희 같은 회사원에게도 흔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제품(혹은 서비스)이 너무 좋지만 어떤 특정한 포인트가 큰 걸림돌로 느껴지거나 납득할 수 없을 정도의 크리티컬한 단점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때부터는 복잡한 심경이 들기 마련이거든요.
이런 요소들을 참고 이해해 보려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지속적으로 내 발목을 잡는다면 그때부터는 의사 결정이 필요한 단계로 접어들게 됩니다. 남아서 어떻게든 개선해볼 것이냐, 냉정하게 판단하고 새로운 기회를 모색할 것이냐의 문제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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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판단에 조금이나마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평소 '나'와 '절'사이의 관계를 꾸준히 체크해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이때는 단순히 뭐가 좋고 뭐가 싫다라는 식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 조직에서의 단점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어도 단점을 인지하고 관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도 보인다면 일말의 기대를 해볼 수 있지만 배에 난 구멍 사이로 점점 물이 들어오는 상황이라면 견디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나의 생존에 직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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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조직을 옮기려 하거나 퇴사를 고민하는 분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실 옮겨서 또 비슷한 상황을 마주할까 봐 겁이 나. 회사 사정 비슷비슷하다는데 거기도 여기와 다를 바가 없을 수 있으니까.'
저도 이 말에 동의하고 한 편 이해도 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지금 떠나려는 이 조직의 단점을 객관적이고 클리어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새로운 곳에 가서 새 출발을 하더라도 내가 갈증과 결핍으로 느낀 그 요소들이 제대로 메워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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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과 비슷한 듯 다른 표현이 영어권에도 존재합니다. 'If you can't stand the heat, get out of the kitchen. (주방의 열기를 견디기 어려우면 주방에서 나가라)'는 말입니다. 보통 동일한 의미로 번역하지만 저는 이 두 속담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속담은 절이 싫은 이유를 명확히 해주지 않지만 영어권 속담은 주방에서 발생한 문제와 그에 대한 해결책을 구분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저만의 비약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저는 절을 떠나기 전 이런 마음가짐을 한 번 가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이 싫은 이유는 뭔가. 그 이유를 내가 해결하는 것이 가능은 한가. 절을 떠난다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문제인가. 새로운 절에서 또 이 문제와 마주친다면 나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