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열문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영 Jan 14. 2024

구색 갖추기가 의미 없어진 이진법의 시대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67

01 . 

트렌드를 예측한다는 건 참 어렵고도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특히나 트렌드에 민감한 일을 하는 저희 같은 입장에서는 더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포인트이기도 하죠.

그래서 가급적이면 '앞으로의 시대는 이렇게 될 거다'라든가 '이런 게 중요하고 이런 건 쓸모 없어질 거다' 같은 이야기는 글로 풀어내지 않으려고도 합니다. 언제 또 세상이 바뀔지 모르는 데다 언제 또 사람들의 관심사가 이동할지 모르고, 무엇보다 저부터가 확신이 들지 않으니 이야기를 할 때 자신감이 떨어지는 게 스스로 느껴지기 때문이죠.


02 .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꺼내보고픈 주제가 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고 쓰는 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뭐 거창하거나 신박한 주제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몇 해 전까지 회사에서 종종 들려오다가 근래에는 종적을 감추다시피한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구색 갖추기'입니다. 과거에는 내부용으로 보고서를 쓰든, 대중을 위한 뭔가를 기획하건 간에 '그래도 구색을 갖추려면~'이라는 말을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에게는 무엇 하나 비어있지 않은 상태,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대충 70점은 맞춰져 있는 상태가 매우 중요했던 거죠.


03 . 

예전에 홍진경 씨가 출연하는 유튜브를 보다가 딸 라엘이가 이렇게 질문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엄마 구색이 뭐야?"

"구색? 구색..? 그니까 뭐랄까. 뭔가 빠짐없이 가지고 있는 거야. 사람들 보기에 너무 없어 보이지 않게끔 일단은 적당히라도 갖추고 있는 거.. 그런 거?"

"음... 그럼 그게 좋은 거야?"

"응..?"


04 . 

저는 이 대화가 의외로 임팩트 있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처음 일을 시작하던 십수 년 전만 해도 (아 근데.. 문득 슬프네요.. 벌써 십수 년이 지났다니.. 암튼) '구색을 갖춘다'는 건 그리 나쁜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꽤 능력 있는 포인트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누가 뭔가를 만들어와도 '그래도 일단 구색은 갖췄네'라고 하면 일종의 'Not Bad'와 동일한 평가였거든요. 심지어 '구색이라도 맞춰놓지 않으면 기본이 안 된 거나 다름 없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10년 만에 조선시대부터 사용해온 이 용어의 늬앙스가 아주 많이 변해버린 것이죠.


05 . 

제가 발을 담그고 있는 브랜딩, 마케팅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지금 누군가 힙한 브랜드 하나를 기획한다거나 잘나가는 팝업 스토어 하나를 론칭한다고 생각하면 그 누구도 '구색'이란 말을 입에 담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1에서부터 10까지의 포인트가 있다면 본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어느 하나에 방점을 찍고 나머지는 톤을 확 죽여버리거나 과감하게 포기해버리는 수준이 될 테니까요. 명확한 일색(一色)이 있거나 아니면 차라리 채색을 하지 않은 상태로 두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이른바 이진법의 브랜딩이 통용되는 시대가 왔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06 .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회사 안에서의 보고 문화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일단 다 때려놓고 보는 식의 구색 맞추기 보고서가 정말 많았습니다. 만드는 사람도 '이 정도는 있어야지~'라는 생각으로 구색을 맞췄고, 평가하는 사람도 '근데 이런 거 하나쯤은 들어가야 하지 않나?'라며 구색이 빈 것에 초점을 맞춰 피드백을 줬습니다. 서로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마치 옥에 티를 찾는 것 마냥 논의를 이어갔던 거죠. 


07 . 

하지만 지금은 명백하게 다릅니다. 좀 웃긴 표현이긴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보고 문화도 '숏폼'인 경우가 적지 않거든요. 저만하더라도 지난주에 진행한 보고에서 불필요한 서론과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결론은 모두 덜어내고 보고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말로 대신할 수 있는 것들은 장표로 만들지조차 않았고 반대로 모두의 머릿속에 임팩트 있게 들어갔으면 싶은 부분은 여러 장을 할애해 설명했죠. 기나긴 스토리텔링 대신 무엇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를 중심으로 명암대비가 확실한 커뮤니케이션이 환영받는 시대가 된 겁니다. 


08 . 

그럼에도 구색을 맞추는 게 어느 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설사 나는 그렇지 않더라도 타깃이나 클라이언트가 그걸 원한다면 어쩔 수 없이 제공해야 하는 경우도 많을 거고요. 

그러나 요즘 세상에는 제대로 된 색깔 하나를 갖추는 것도 지극히 어려운 법임을 모두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 와중에 구색(九色)을 갖추려는 노력은 어쩌면 이를 제공받는 입장에서도 반신반의하는 일일지 모르죠. 저 중에 분명 몇 개는 제대로 된 색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먼저들 테니 말이죠. 


09 . 

뉴욕 예술 문화계에서 정상급 큐레이터로 손꼽히는 인물이자 현 구겐하임 미술관 대표 큐레이터이기도 한 알렉산드로 먼로는 한 인터뷰를 통해 요즘 시대의 예술 소비를 한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미술관에 오면 '어떤 순서로 보는 것이 가장 좋으냐'고 물어요. 그런데 나이가 어린 친구들이 오면 '여기서 딱 하나만 봐야 한다면 뭘 봐야 하냐'고 물어요. 과거에는 조금씩이라도 다 맛보는 걸 추구했다면 지금은 자신에게 완벽한 임팩트를 줄 수 있는 단 한 가지에 집중하는 시대입니다."


10 . 

저는 이 말이 향후 수십 년간의 트렌드를 이끌어가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예측을 해봅니다. 이미 세상의 많은 것들이 상향 평준화 되어가고 있고 '모든 것을 갖춘다'는 것이 완벽이 아닌 형식으로 인식되는 세상 속에서는 단 하나를 갖더라도 제대로 된 걸 갖는 게 중요하니까요, 어디에 방점을 찍고 무엇을 강조할 것이며 어떤 것들을 페이드아웃 시킬지를 결정하는 게 핵심 역량으로 작동하는 세계에 우린 이미 진입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타인의 시간을 훔치는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