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열문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영 Jan 11. 2024

타인의 시간을 훔치는 사람들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66

01 . 

얼마 전 배우 하지원 님께서 방송 인터뷰를 통해 시간 약속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늘 촬영 현장에 30분 정도 먼저 도착하려고 한다는 하지원 님은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상대방의 소중한 것을 빼앗는 것과 같은 행동이라고 말씀하셨죠. 저는 그 말이 참 크게 공감되었습니다. 시간 약속이 곧 신뢰라는 말은 귀가 아프게 들었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점점 늘어날수록 이보다 더 중요한 매너가 있을까 싶은 생각까지 드니까요.


02 . 

시간은 누구에게나 자산입니다. 그리고 나의 한 시간이 다른 사람의 한 시간과 다르고, 또 각자가 처한 상황과 바쁨의 정도를 따져본다면 1만 원 같은 한 시간이 있고 100만 원 1,000만 원 같은 한 시간이 있죠.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와의 약속에서 단 10분이 늦었다고 하더라도 상대에게 끼친 손해가 얼마일지는 쉽게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상대는 나를 위해 10분 먼저 출발했고, 나 때문에 10분을 허비했다면 총합 20분을 손해 보는 것이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지각은 최악의 습관 중 하나인 거죠. 


03 . 

예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는 주제이지만 저는 대학생 시절에 과제를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공부에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전혀 아니고 과제는 늘 학생들과 교수님 앞에서 발표를 해야 했기 때문이죠. 만약 제게 15분의 발표 시간이 주어진다고 하면 교수님이 직접 진행하실 수 있는 시간의 15분을 대신 쓰는 것이자 수십 명의 학생들이 가진 각자의 15분을 곱한 시간에 해당하는 거니 대충 준비하거나 어버버 거리다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시험은 망쳐도 발표는 망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시간의 중요함'이었던 거죠.


04 . 

이런 생각과 습관은 회사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같이 일하기 힘든 최악의 유형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하면 시간 관리와 일정 관리에 무능력한 사람을 꼽습니다. 그중에서도 회의 시간 안배를 제대로 못하거나 발표나 PT 자리에서 사전 연습을 전혀 하지 않은 채로 마치 세상의 시간이 모두 자신의 시간인 것처럼 사용하는 사람은 (과격한 표현입니다만...) 최악의 악과 다름없죠. 심지어 순서가 정해져있는 발표라면 그 한 사람 때문에 뒤따르는 모든 사람의 타임 테이블이 꼬이기 때문입니다.


05 . 

보통 타인과의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도 시간 관리에 자주 실패하는 케이스가 많습니다. 즉, 시간 자체에 대한 습관이 잘못 들어있기 때문에 혼자서 계획을 세웠든 누군가와 약속을 했든 간에 늘 미루거나, 늦거나, 까먹거나,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은 거죠. 

대신 목숨이 무한한 게임을 반복하는 것처럼 언제나 새로운 시간이 주어진다는 안일한 생각이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은연중에 '이래도 큰 문제 없는 없을 거다. 여차하면 미안하다고 하면 된다'는 자세로 슬쩍 넘기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니 습관을 반성하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매번 놓치는 것이죠.


06 . 

글을 읽다가 '아니, 뭐 이렇게까지 혼낼(?) 일인가?' 싶으신 분도 계실 줄 압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마다의 사정으로 늦기도 하고, 때로는 2시간 걸려 온 친구가 10분 거리에 사는 친구로부터 약속 시간에 늦었다며 핀잔을 듣는 장면을 목격할 때도 많습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시간은 더더욱 공평하지 않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죠. 하물며 제가 시간의 중요함을 설파하면 '너는 살다 늦을 일이 없을 줄 아냐?'며 저주 공격을 날리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이제는 그 친구한테 혼날까 봐 더 안 늦으려 하는 것도 같고요...)


07 . 

하지만 40년 가까운 인생을 살면서 배운 한 가지는 '안 늦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늦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각하는 사람은 그 빈도가 다른 사람에 비해 월등히 높고, 한 번 지각해서 대충 분위기를 살피다 좀 늦어도 되겠다 싶으면 그 뒤로는 고삐가 풀린 사람처럼 지각하는 경우도 다반사였거든요. 심한 말로 비유하자면 남의 돈 100원 가져가 봤다가 별말 안 하니 1,000 원 가져가 보고 그래도 괜찮은 거 같으니 10,000원 빼 쓰는 사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08 . 

예전에 부모님께서 콘서트를 보러 가셨던 한 공연장에 제가 마중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공연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관객 한 분이 공연장 관계자로 보이는 분과 실랑이를 하고 있더군요. 얼추 내용을 들어보니 정해진 인터미션 시간 외에는 입장이 안된다는 공연장 측과 얼마 늦지도 않았는데 방해 안 되게 조심히 들어가겠다는 관객분의 주장이 맞선 거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공연장 관계자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09 . 

"가수분도 그렇고, 안에 입장해계신 관객분들도 그렇고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오래 기다리셨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속상하신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분들께서 그동안 기다리고 또 준비해오신 공연에 작은 방해 행위라도 발생시키는 건 저희의 직무유기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시간 개념에 또 하나의 관점이 추가되더군요. 각자에게 주어지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누군가에게 중요한 약속이라면 그건 며칠 전, 몇 주 전, 몇 개월 전부터 기다리고 준비했을 수 있으니 그 약속을 어겼을 때의 타격감은 이루 말할 수 없겠구나 하고 말이죠.


10 . 

그러니 시간 약속을 어기는 사람도 상대의 관대함을 바래선 안되고, 상대방 역시 자꾸 이해하고 받아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내가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지켜주는 것만큼이나 그 사람의 시간을 지켜주는 것 역시 아주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력이야말로 재능의 영역이 아닐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