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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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기획자의 독서⟫라는 타이틀로 독서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 모임의 주제는 다름 아닌 '회고'였고 제가 선택한 책은 다니엘 핑크가 쓴 베스트셀러 ⟪후회의 재발견⟫이었죠. 덕분에 후회라는 관점을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었고 멤버분들 각자가 개인적으로 하는 회고와 또 업무와 연관해서 하는 회고 스타일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찐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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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을 끝내기 전에는 그날의 키워드에 대해 짧게나마 제 생각을 공유하는 '키워드 노트'라는 시간이 있는데요, 저는 이번 모임의 키워드 노트에서 '디폴트 값'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른바 '기본값'의 의미인 그 디폴트입니다.
살다 보면 '후회'라는 대상은 필연적으로 '기대'라는 대상과 동행하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의 원인을 찾고자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이동해 본다면 그 즈음에 이르러서는 현재의 결과와 전혀 다른 기대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후회의 의미를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기대가 출발되던 그 시점의 기본값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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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러운 얘기긴 합니다만 저는 우리가 너무 쉽게 '잘하고 싶다'라는 목표를 세운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연히 뭔가를 할 때는 잘하는 게 중요하고, 비단 잘하는 것뿐 아니라 그게 정량적으로든 정성적으로든 눈에 보이는 결과로까지 이어져야 함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알 듯이 확률상으로도 잘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성공보단 실패의 확률이 높고, 뭔가에 능숙하기보단 서투를 확률이 높으며, 심지어 성실하기보단 게을러질 확률이 높고, 이로 인해 만족보단 불만족의 확률이 높아지니까 말이죠.
그러니 언제나 기본값에 해당하는 디폴트는 부정의 상태에 훨씬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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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후회나 회고를 할 때는 무엇을 디폴트 값으로 설정할 것인가가 말 그대로 기본 중의 기본이 됩니다. 4년 전쯤 첫 책 출간을 앞둔 저에게 가장 큰 고민은 '책이 잘 안 팔려서 출판사에 손해를 끼치면 어쩌나'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직접 투고한 것도 아니고 제안을 받아서 출간하는 것이니 결과에 크게 연연하지 말자'는 마음도 한순간일 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죠. 그래도 자기만족을 위해 내는 책이 아니라 비즈니스의 공식에 의해 출간하는 책인 만큼 일정 수준의 판매량을 올려야 한다는 기특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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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히려 제게 큰 용기를 준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출간되는 책의 95%는 초판을 다 판매하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그 시장의 디폴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나니 제 걱정이 무색해지기까지 하더군요. 어쩌면 저는 100미터 달리기의 디폴트 기록들이 어떤 수준인지도 모른 채 '아.. 적어도 10초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니까요. 초판을 모두 판매하고 재쇄에 들어간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1만 부 판매 기념'이라는 딱지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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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나올 만한 반론을 하나 예상해 보겠습니다. '지금 네 말은 기본 값만 하더라도 잘했다는 얘기냐? 결국 목표를 낮춰 만족감을 높이라는 얘기냐?'라고 말이죠.
답변부터 하자면 제 의견은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제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른바 '잘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그 관계성을 되새겨보자는 것이니까요, 한편으로는 달콤한 말이 아닌 훨씬 더 쓰고 냉혹한 메시지에 가까울 수도 있겠단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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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때 경영학과 복수 전공 과정을 밟고 있을 당시 '생산 관리(Operations Management)'라는 과목을 듣게 되었습니다. 수학 공식도 많이 나오고 사례들도 어려워서 딱히 좋아하던 과목은 아니었는데 우연히 불량률에 대한 부분을 배우다가 책에 쓰인 표현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 기억이 납니다.
'인간이 생산하는 모든 제품은 고장이 난다. 즉, 고장이 발생한다는 명제를 기본으로 이 확률을 줄여나가는 것이 품질을 관리하는 기본이자 실질적인 목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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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충격은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세상에.. 고장이 나는 게 디폴트 라니요. 이때까지 제가 돈 주고 샀던 모든 전자 기기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순간 이런 생각이 뒤따랐습니다. '뭔가 하나를 제대로 동작하도록 잘 만든다는 것은 진짜 힘든 일이구나...'라고 말이죠.
그러니 어쩌면 저는 꽤 운이 좋게도 기본 값을 인지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 기본 값을 벗어나서 '잘했다'라고 평가받는 그 지점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를 꽤 일찍 깨달은 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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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후회'와 '회고'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든 업무적으로든 회고에 들어가는 순간 좋게 기억되는 것보다 후회되는 부분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좀 더 잘할걸', '더 부지런히 움직일걸', '기회가 있을 때 해볼걸', '그 말이라도 한 번 던져볼걸' 같은 무수한 유형의 후회를 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이렇게 단편적으로 하는 후회들은 시간이 지나 비슷한 상황에 마주했을 때 또 유사한 행동과 선택과 결정으로 우리를 이끌 가능성이 큽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 후회의 포인트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역량과 에너지가 투여되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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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어떤 일을 함에 있어 그 일의 디폴트 값을 알고 시작한다는 것은 나중에 가서 제대로 된 회고와 제대로 된 후회를 할 수 있는 일종의 자격을 얻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대부분 아주 흔한 말들로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선, 아니 적어도 제대로 된 후회를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중력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지금 여러분 눈앞에 있는 일의 디폴트는 무엇인지 그리고 올 한 해 세운 목표의 디폴트는 또 무엇인지 한 번 들여다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란 말씀을 드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