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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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글로도 한번 풀어낸 적이 있지만 저는 '대안이 없으면 비판도 하지 말라'는 스탠스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대안이 없더라도 잘못된 지점은 정확히 비판할 수 있는 건강한 문화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하고, 그래야 누구든 지적할 부분에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는 법이거든요. 잘못을 보고서도 '근데 난 대안이 없는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게 한다면 그건 발전 가능성이 낮은 조직이나 다름없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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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이 대안이라는 것을 잘 활용할 필요도 있습니다. 염두에 두지 않으면 나중엔 아예 옵션에서조차 사라지게 되는 것처럼 매번 마땅한 대안을 낼 수는 없더라도 내 나름대로 좋은 대안들로 생각을 확장해 보는 연습은 참 중요하기 때문이죠.
물론 '시키는 것만 하기도 벅찬데 어떻게 그런 대안까지 생각할 수 있겠어요..?'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바로 이 포인트에서부터 관점을 전환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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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주아주 주니어였던 시절 들었던 말 중에서 '시키는 것만 잘해도 회사 생활의 80%는 다한 셈이다'라는 말이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선 두 가지의 양가감정이 한 번에 밀려왔거든요.
'시키는 걸 잘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디렉션을 준 사람의 의도대로 잘 구현해 내는 걸 말하는 걸까?'
'그럼 그 이상의 가치를 제안하기 위해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시키는 대로만 하면 결국 온전한 내 성장은 불가능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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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역시 그때 뾰족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던 기억입니다. 심지어 저 문제조차 그리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디렉션 받은 것만 하기에도 벅찬 시절도 겪어봤고 또 그러다 운좋게 제가 제안한 아이디어나 기획이 채택되면 자신감도 적당히 얻어가며 큰 기준 없이 살았던 시간이 적잖이 길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시점에 들어서는 의도적으로 별도의 대안을 고민해보는 노력이 필요하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상대방이 내 생각과 의견에 대한 의지를 꺾더라도 그냥 포기하거나 혼자 씩씩대기만 할 게 아니라 최소한 내 안에서 조금이라도 그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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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저는 '까인 아이디어'에 대한 메모들을 정리하는 이른바 ALT NOTE(대안 노트)를 써보기 시작했습니다. 즉 곧바로 수긍이 될 정도로 타인의 근거 한방에 나가 떨어진 아이디어들 대신 어느 정도 디베이트를 거치다가 특정한 지점에서 막혀 제 의지를 관철시키지 못한 아이디어들에 대한 나름의 복기를 해 본 거죠.
이때는 주로 두 가지 포인트에 집중해서 노트를 해봤는데요, 하나는 일단 까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채택되었다는 가정하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밀고 나가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느 순간에 또 까임(?)이 치고 들어올지를 예상해 보며 그 포인트를 짐작해 보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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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도를 한 이유는 사실 명확했습니다. 바로 안타까움에서였죠.
저도 옛날엔 제가 제시한 아이디어가 반대에 부딪히면 그 아이디어 전체가 부정당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획자에게 그만큼 속 쓰린 경험도 없을 테니까요.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아이디어들 중엔 약간의 조합이 잘못되었을 뿐 그 생각의 조각조각들은 꽤 쓸만한 것들이 많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내 아이디어가 까인 것에 대한 화남, 슬픔, 서운함, 자존심 상함보다도 '아까움'이 먼저였던 거죠. 먼지 탈탈 털고 고장 난 부분 좀 고치면 다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들에 주목해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그 이유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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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렇게 정리한 ALT NOTE를 어떻게 활용했느냐 물으신다면 이건 좀 추가 설명이 필요합니다. 사실 저는 이 ALT NOTE를 리뷰 하면서 단 한 번도 '와 이제 실마리를 찾았다. 이렇게 해볼걸!'이라고 혼자 유레카를 외쳤던 적은 없었습니다. 대신 다른 회의를 하다가 예전에 간단히 메모해둔 ALT NOTE가 기억나서 '아, 저 예전에 제가 까였던 아이디어가 있는데요...' 하면서 말을 꺼내면 사람들이 거기에 예상외로 흥미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아마도 이건... 타인이 성공시킨 아이디어보다 까였단 아이디어라는 그 워딩 자체가 주목을 끌었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타인의 불행은 곧 나의 행.. 아닙니다. 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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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어? 근데 난 그 아이디어 좋은데?'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간간이 등장했고, 그분들은 꽤나 진심으로 '왜 그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았는지'를 궁금해했습니다. 그리고 ALT NOTE의 힘은 바로 거기서부터 발휘됐죠. 만약 제가 그 물음에 '몰라요. 그때 보고받는 분이 기분이 좀 이상했나 보죠'라거나 'ㅎㅎㅎ 제가 봐도 별로였어요'라는 식으로 대답했다면 거기서 대화가 종료되었겠지만 '그래서 제가 제 아이디어가 채택되었다는 가정하에 생각을 한번 이어가 봤는데요~'라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그 스토리에 훨씬 더 주목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얻은 친구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픈 마음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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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실제로 꽤 많은 접점에서 이 ALT NOTE에서 건져올린 아이디어가 활용되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동료들의 디벨롭과 운 때가 맞아 들어간 적당한 타이밍이 한몫한 것도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래도 제가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놓은 것 역시 작은 도움은 되었다고 보거든요. 무엇보다 내 아이디어가 무너진 그 지점을 잘 기억하고 다시 그 지점과 마주한다면 어떻게 대응할지를 계획하고 있다는 건 제 아이디어를 다시 재활용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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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저는 '대안'이라는 것도 늘 새로운 것 혹은 정반대의 것, 기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나 내가 스스로 포기했던 아이디어 창고 속에서 발견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는 사람이 매번 새로운 생각을 짜낼 수 없고, 또 내가 까인 아이디어가 온전히 내 능력 부족으로 까인 게 아니라는 약간의 정신승리를 해본다면 우리가 버린 생각 속에서도 좋은 단초를 주울 수 있는 거니까요, ALT NOTE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아이디어를 너무 쉽게 버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대안을 차곡차곡 쌓아보는 것도 좋은 자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