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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Dec 07. 2020

기획자는 구조를 수집하는 사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세요. 요놈은 어떤 구조인가 하고 말입니다. 

#기획자의 독서법 

기획 일을 하는 모든 분들을 위한 '책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기획자라고 했지만 마케팅, 브랜딩, 광고, 컨텐츠, 상품,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 만들고 - 내놓는 일을 하는 분들을 위해 글을 씁니다. 






구조, 모으고 계신가요? 

 

소설가 김영하 씨는 '작가는 말을 수집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일상 속 말들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재미있는 단어가 발견되면 곧장 수첩에 기록해 둔다고 하죠. 각 지방에서 사용하는 고유한 방언들,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는 빛바랜 단어들도 놓치지 않고 긁어모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다 보면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독특한 단어들이 자리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말은 사람의 목소리, 표정, 제스처와 함께 전달되기에 의미를 파악하기 그나마 유리하지만, 글로 쓰인 단어들은 앞뒤 문맥 말고는 딱히 그 뜻을 유추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니 조금 번거롭더라도 사전을 찾아가며 음미하듯 읽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직업에나 이 수집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가 말을 수집하는 사람이라면 기획자는 구조를 수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조(構造)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부분이나 요소가 어떤 전체를 짜 이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조의 영어 단어 Structure는 '세우다(build)'의 의미인 'Struct'라는 어근에서 파생되었죠. 실제로 구조의 유의어들도 우리가 흔히 아는 단어들입니다. 어떤 시스템의 기반, 틀이라는 의미의 Framework,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배열인 Composition, 기질이나 특성 혹은 물성의 조합인 Make-up에도 구조라는 뜻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직물이라고만 알고 있는 Fabric도 실은 '구조', '뼈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죠. 


정리해보자면 '흩어져 있는 것들을 모아 짜임새 있게 만든 모든 것'을 구조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기획 일을 하는 사람들은 요소와 형태만 다를 뿐 모두가 나름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셈이죠. 




구조에 대한 관심은 기획자의 본능과도 같습니다. 


'저거 어떻게 한 거지?' 


기획 일을 하는 동료들을 만나면 직업병처럼 나오는 말입니다. 힙한 마케팅 사례를 발견하거나 뜨는 동네의 핫 플레이스를 가더라도 '와 좋다', '이야 멋지다'로만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 이런 프로젝트를 시작했는지, 또 다른 연결고리의 광고나 캠페인이 있는지, 결과적으로 이 활동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름의 유추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회사 불평이나 커리어 고민을 하다가도 '잠깐만, 근데 나 이거 사진 한 장만 찍어 놓을게'하며 감각적인 디자인의 메뉴판을 촬영하는 친구를 보면 어쩔 수 없는 천직이다 싶기도 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좋은 브랜드를 만날 때 더 그렇습니다. 기획물 중에서도 브랜드는 '구조' 공부하기 참 좋은 수업 자료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브랜딩을 부를 때 잘 '정립(定立)'된 브랜드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탄탄한 가치관으로 바닥을 다지고 그 위에 꼭 필요한 양질의 요소들로 기둥을 세운 다음 사람들의 눈과 손이 직접 닿는 곳곳을 매끄럽게 마무리하는 일련의 과정이 바로 브랜딩이니 말입니다. 좋은 브랜드를 하나하나 분해하듯 살펴보면 감탄과 존경심이 번갈아 일어납니다. 


대학교 때는 유니타스 브랜드라는 책을 즐겨 읽다가 매거진B가 나온 이후로는 여기에 푹 빠졌습니다. 모든 이슈와 에피소드를 빼놓지 않고 봤습니다.



100년을 훌쩍 넘는 위대한 브랜드들도 당연히 좋아하지만 최근에는 작고 민첩한 브랜드들에 더 관심이 갑니다. 특히 여행지에서 멋진 로컬 브랜드를 만나는 것은 더 없는 행운이죠. 시간이 촉박하니 최대한 많이 찍고 기록하려고 노력합니다. 매장 직원이나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질문도 쏟아냅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좋은 브랜드는 사장, 직원 구분 없이 모두가 자신의 브랜드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뿐인가요. 브랜드를 지탱하는 철학과 가치관도 서로 완벽하게 공유하고 있습니다. 마치 각자 머릿속에 거대한 도면이 들어있는 느낌입니다.




당연히 좋은 기획은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죠


영상이나 콘텐츠 기획물에도 구조가 있습니다. 10분 남짓한 유튜브 영상 한 편에도 수없이 많은 구성 요소가 구조적으로 배열되어 있죠. 편집자가 어디에서 효과음을 주고 어떤 자막을 입힐지, 어떤 부분을 살리고 어느 지점을 도려낼지 그 구조를 잘 짜지 않으면 좋은 영상이 될 수 없습니다. 콘텐츠를 떠받치는 구조가 허술하면 시청자나 독자는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별로야. 재미없어' 냉정한 이 한마디 평가 속에 구조적 결함이 모두 녹아 있습니다


저는 요리를 먹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특히 저는 일식 초밥 코스인 '스시 오마카세'를 좋아하는데요, 무엇보다 그 안에 담긴 음식의 구조적 모습이 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마카세는 일본어로 '맡기다'라는 뜻의 任せる(마카세루) 앞에 존경의 의미인 お(오)를 붙인 말로, 요리사에게 메뉴 선택의 전권을 맡기는 코스 요리입니다. 쉽게 말해 주는 대로 먹어야 하는 것이죠. 요리사는 식재료 선택부터 전반적인 메뉴를 구성함은 물론이고 중간중간 어떤 음식으로 쉬어 가는 타이밍을 줘야 할지까지 고민합니다. 기름진 생선이 한꺼번에 몰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앞에 나온 음식의 잔향이 이어지는 음식의 맛에 영향을 주지 않게 코스를 구성합니다. 게다가 손님마다 선호하는 재료와 스타일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식사를 위해서는 코스 전체의 구조를 정말 잘 짜야 하는 분야입니다. 입안에 있는 음식 맛을 음미하는 미시적 재미만큼이나 전체 과정을 보는 거시적 재미까지 있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요리입니다. 


쉐프도 기획자죠. 암요.




텍스트들도 구조 공부하기 정말 좋은 재료입니다


'기획된 모든 것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항상 구조를 보는 연습을 하자.' 스스로 자주 되뇌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기획자라면 누구나 구조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뜯어보고, 비교해보고, 더 나은 것은 없을지 고민해 보는 것이 기획 일을 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텍스트를 좋아하는 만큼 책이나 신문기사, 카피 한 줄에 이르기까지 글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것을 즐깁니다. 책의 경우 목차를 중심으로 글을 풀어가는 형식을 주의 깊게 봅니다. 명확하게 주장을 펼치는 스타일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의중이 드러나도록 하는 편인지, 경험담을 위주로 공감을 끌어내는지 논리와 근거로 팩트 폭력을 가하는지를 구분해 가며 읽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잊을만하면 책의 주제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작품도 있고 여러 번 읽으며 독자가 직접 생각을 발전하도록 틈을 열어놓은 구조의 책도 있습니다. 특히 소설은 구조들이 매우 자유롭고 실험적이라 더 재미있습니다. 수능 공부할 때는 언어영역 작품들의 구조를 공부하는 게 그렇게도 따분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서야 그 참맛을 알아가나 봅니다. (하긴 참고서에 구조에 대한 설명이 떡하니 먼저 나오니 더 흥미가 없을 수밖에요. 남이 만들어 놓은 레고를 다시 부셔서 만들면 무슨 재미겠습니까.) 


반대로 신문기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읽는 경우가 많은데요.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내리다가 제목 장사에 낚여서 클릭하는 경우도 있고 회사 동료들이 있는 단체 채팅방에 공유되는 주요 기사들로 뉴스를 접하기도 하죠. 70% 이상의 기사는 헤드라인만 읽고 넘어가고 완독하는 기사는 5%나 될까 싶습니다. 

대신 기획 기사나 매거진은 굉장히 좋아합니다. 대담 형식으로 풀어가는 명장들과의 인터뷰는 거의 빼먹지 않고 보는 편입니다. 큰 담론 아래 치열한 취재를 바탕으로 다년간의 흐름을 분석한 글들은 읽는 내내 감탄을 멈추지 못합니다. 그런 글은 그 구조가 매우 입체적으로 보이기까지 하죠. 기사를 읽으며 더 이상 '왜?'라는 반문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잘 짜여진 글은 큰 희열을 줍니다. 와인으로 치자면 풀 바디(Full-Body)에 가까운 맛이 글에서도 날 수 있다는 걸 느낍니다. 


개인적으로는 광고 카피처럼 짧지만 임팩트 있는 글의 구조를 가장 좋아합니다. 광고는 물론이고 상품 소개서에 쓰인 문구들도 꼼꼼히 읽어보며 하나하나 분해해 봅니다. 특히 카피의 경우는 텍스트로 쓰여 있더라도 꼭 입으로 발음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으로 맞닥뜨릴 때와 입에서 발음해볼 때의 질감은 꽤 많이 다르거든요. 아마도 마케팅이나 상품기획을 하는 분이라면 상세 페이지를 기획할 일이 많을 텐데요, 가능한 디자인에 넘기거나 오픈하기 전에 내가 쓴 모든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눈으로 읽어 내려갈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이질감이 느껴진다면 곧바로 수정해야 합니다. 


카피나 상세 설명은 긴 글에 비해 훨씬 압축적입니다. 그러니 구조가 체계적이지 않으면 더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웹페이지 광고 문구는 최신 유행어로 도배해 놓고 정작 랜딩 페이지를 클릭해보면 전혀 맞지 않은 톤 앤 매너와 화법이 전개되고 있는 케이스를 많이 봅니다. 말과 글도 기능이자 UX(사용자 경험)입니다. 마케터나 카피라이터가 구조를 무시한 채 자기 흥에 취해 쓴 글은 수명이 짧고 효과가 작습니다. 그러니 남이 쓴 카피를 보건 내가 쓴 카피를 리뷰하건 간에 반드시 구조적 분석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단어와 문장이 그 위치에 있어야 할 이유를 찾아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획을 세분화하고 그 안에서 또 이과, 문과의 특성을 구분하곤 합니다. '나는 기능 기획을 하니까 논리적이어야 하고 너는 콘텐츠 기획을 하니까 말랑말랑한 감성이어야 해'라는 식이죠. 하지만 어떤 기획을 하건 간에 구조적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서는 뼈대를 세울 수 없습니다. 특히 '나 글 좀 써'라고 자신만만해 하는 분들이라면 스스로를 한 번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지금 긁어모으는 것이 기획의 구조인지 아니면 개인의 취향인지 말입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대박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사람은 예술가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드디어 직쏘 퍼즐의 마지막 피스를 찾았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기획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세요. 요놈은 어떤 구조인가 하고 말입니다. 






여담 (餘談)
‘그럼 이건 OO님이 한번 디벨롭 해주세요.’ 
혹시 회의 때 이런 말씀 많이 듣지 않나요? 저는 이 말을 ‘구조를 만들어 보라’라고 해석합니다. 아이디어를 실행 가능한 수준에 올리려면 구조적인 기획이 필요하니 말입니다. 어쩌면 흔히 말하는 ‘디벨롭’은 단순히 발전시키는 것이 아닌 흩어진 것들을 모아 짜임새를 갖추는 과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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