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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Nov 22. 2020

중2병과 베스트셀러

오늘도 '다름을 위한 다름'만을 좇는 당신에게 

#기획자의 독서법

기획 일을 하는 모든 분들을 위한 '책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기획자라고 했지만 마케팅, 브랜딩, 광고, 컨텐츠, 상품,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 만들고 - 내놓는 일을 하는 분들을 위해 글을 씁니다. 






저는 ‘중2병’이란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흔히 ‘허세’라는 단어의 대체어 쯤으로 쓰이고 있는데 왠지 사춘기 시절의 자아정체기를 싸잡아 비하하는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그럼에도 저 역시 비슷한 뉘앙스로 사용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단어라는 것은 참 묘해서 사람들 사이에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이를 반대하거나 완화시킬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그 자체가 일상 용어로 자리 잡아 버리게 되거든요. (학창 시절 별명이 붙는 과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러니 이상한 별명이 붙을 것 같으면 얼른 친구 녀석에게 대체어를 제시하세요.)


흔한 인터넷 은어들과는 달리 중2병은 제법 긴(?) 역사와 뚜렷한 출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작은 1999년. 일본 배우인 이주인 히카루(伊集院光)가 자신의 라디오 방송에서 처음 사용하면서부터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 생이라면 누구나 할만한 행동’이라는 주제로 시청자들에게 중2병 사연을 받는 코너를 방송한 것이 시초였죠. 이후 대중적으로 널리 쓰임새를 갖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우리나라에도 안착했습니다. 중2병을 분석한 일본의 한 서적에서는 중2병의 전형적인 증세를 몇 가지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그중 재미있는 항목은 ‘서양 음악에 심취하기 시작하며, 이른바 ‘(대중은 잘 모르고) 나만 아는 아티스트’에 집착한다’입니다.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죠. 저는 어릴 때부터 흑인 음악을 좋아해서 또래 친구들이 다 락발라드에 빠져있을 때 홀로 힙합과 R&B 음악을 들으며 ‘그 병(?)’을 겪었습니다. 한국의 힙합 아티스트들도 좋아했지만 학교나 지하철에서는 항상 해외 힙합 음악을 들었습니다. 뭔가 있어 보였거든요. 한 푼 두 푼 모은 용돈으로 레코드샵에서 CD를 고를 때면 ‘부모 주의 요망 : 노골적인 표현이 있음(Parental Advisory : Explicit Content)’이란 경고 스티커가 있는 음반만 집어 들었습니다. 다른 음악도 아니고 힙합인걸요. 암요 그래야죠. 


지금 생각하면 흑역사 수준의 허세이자 자아도취였습니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오글거리는 이야기도 해볼까요? 저희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번화가에 구제 옷가게가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힙합 의류는 물론이고 미국에서 건너온 레어템들이 꽤 많아 그곳에 가는 게 너무 신나고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그 가게의 진짜 재미 포인트는 바로 사장님이었습니다. 얼마나 수완이 좋았던지 하루는 구제 청바지를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여기 다리 부분에 빨간 자국 보이지? 이게 뭔 줄 알아? 핏자국이야 핏자국. 미국에서 래퍼하던 놈이 골목에서 마약 팔다가 다리에 총을 맞았는데 그걸 그대로 입고 다니다가 흘러 흘러 여기까지 온거야. 원래는 아무한테나 안 보여주는 데 너희니까 내가 특별히 구경이라도 시켜 주는거야."


지금 같으면 당근마켓에 올려도 믿는 사람 하나 없을 이야기에 저와 제 친구는 침을 흘리며 빠져들었습니다. 비록 비싼 가격이라 청바지는 사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지만 그런 남다른 이야기들이 저의 흑인문화 사랑을 더욱 진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분이 제 고향 최초의 스토리텔러라고 생각합니다.)    


이쯤 되니 중2병의 본질이 뭘까 궁금해졌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 시작한 스스로에 대한 여행쯤일 수 있겠죠. 그리고 그 여행의 첫 번째 단계는 당연히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독특한 아티스트와 본인을 어떻게든 연결 지으며 주위 집단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분리해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죠. 다만 나에게 집중하기 보다 타인을 의식하는 행위가 지나치면 그것이 곧 허세이자 중2병이 되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중2병이라는 것이 꼭 그 시기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사춘기가 와도 모자를 나이의 사람들 중에도 종종 그런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있죠. 특히 크리에이티브 관련한 분야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간혹 저 사람이 지금 맡은 업무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개인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있는지 구분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의 본질에 몰두하기 보다 다른 것들과의 구분에 목적을 두다 보니 허세와 자아도취가 업무에까지 묻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새로운 것만을 찾거나 일단 튀어 보이는 것을 선호합니다. 혹은 자신이 만든 것에 너무 과한 의미를 부여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쉽게 공감하기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한 모임에서 소위 광고계의 어른으로 통하는 분을 뵌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도 박학다식하기로 소문나신 분인데 후배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불리는 별명이 ‘입꾹’이라고 하더군요. 어떤 말을 해도 ‘그게 아니라’로 시작하기 때문에 차라리 그분 앞에서는 입을 꾹 다무는 것이 낫다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랍니다. 제가 참석한 그날은 우연하게도 책에 관련한 이야기가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나는 서점에 가도 베스트셀러 코너는 근처도 안가. 그거 다 상술이야. 오히려 책 안 읽는 사람들을 위해 제일 가볍고 간편한 내용만 추려놓은 거거든. 반찬으로 치면 소시지, 돈가스 그런 거라고. 맛있어도 영양가는 없지.”


그러면서 본인이 근간에 읽은, 이름도 외우기 힘든 동양사학 관련 서적을 줄줄 읊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입꾹이가 되어 제 앞의 음식들만 부지런히 먹어 치웠습니다. (참고로 잔소리를 피하는 최고의 방법은 입안의 음식 맛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식가가 되어가나 봅니다.)  


저는 베스트셀러 코너에 참 관심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설이든 경제 서적이든 사람들이 많이 찾고 매대에 오래 머무는 책들에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큰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제가 다니는 회사가 대중이 사용하는 서비스와 제품을 만드는 곳이기에 늘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그중 베스트셀러는 현대 관심사의 집약체와도 같습니다. 방송에서 큰 화제를 모은 인물의 자서전도 있고 병마와 싸워 이긴 분투기를 기록한 에세이도 있습니다. 일상생활에 쉼표가 되어주는 시집도 있고 젊은 날의 청춘을 날 것 그대로 토해낸 비평서들도 자리하고 있죠. 그 외에도 갖가지 책들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6개월 이상씩 매대를 오르내리며 경쟁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물러서 제목만 훑어봐도 베스트셀러 코너가 전해주는 인사이트가 있습니다. 전 그게 참 흥미롭습니다. 


저 역시 가끔은 베스트셀러 책들이 가볍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입꾹’ 어른께서 언급하신 소시지, 돈가스 반찬 같은 책들이 어떤 것일지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대중문화를 외면하고 점점 깊은 구덩이만 파고 들어가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세상과 사람을 관찰하고 이를 제품이나 서비스에 녹여내야 하는 기획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죠. 

저도 한때는 내년의 소비심리를 예상하고 분석해놓은 이른바 ‘OOO 트렌드’의 서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비약인 듯 보이는 내용도 많고 억지로 짜 맞춘 듯한 메시지의 나열이 조금은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항상 그런 책들을 직접 사서 읽어봅니다.  싫다고 외면하는 것과 직접 체험하고 나서 좋고 싫음을 가리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요. 

영화나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만 관객이 든 영화라면 취향을 막론하고 어떤 작품인지 궁금해서 달려갑니다. 가요 차트의 음악들도 한 번씩은 들어보는 편이구요, 잊을만하면 새로 등장해 품귀 현상을 빚는 과자와 음식들, 유행어를 쏟아내는 핫한 TV 프로그램도 일단 경험부터 해보고 판단하려 합니다.


본인의 취향을 잘 알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은 요즘 시대에 참 중요한 경쟁력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죠. 그러나 무엇인가를 기획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의 취향과 타인의 취향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중은 좋아하지만 나에게는 별로인 것, 반대로 나는 너무 좋아하지만 대중적으로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해보는 자세가 늘 필요하죠. 그리고 냉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저는 B급 감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친한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말장난이나 농담하는 것은 참 즐거운데 사용자 혹은 고객들에게 다가가는 메시지에 B급 감성을 담으려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어딘가 어색해집니다. 그러니 B급 코드를 활용한 마케팅보다는 감각적이고 세련된 사례들에 눈이 먼저 갑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 취향과 장단점일 뿐입니다. 업무에 있어 전략적으로 ‘B급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맞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별로 흥미가 없는 것들도 한 번쯤은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노력합니다. 싫어하는 것, 자신 없는 것이라고 기피하면 그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점점 낮아지고, 그것이 꼭 필요한 때에도 고려 대상에서 은근슬쩍 제외하게 되거든요. 결국 야구 방망이를 써야 할 때 탁구채를 드는 해프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책이든 음악이든 혹은 음식이든 간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는 꼭 한 번 가까이 가보기를 권합니다. 


나름 이 업계에서 연차가 쌓이다 보니 ‘다름을 위한 다름’ 만큼 촌스러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는 것은 달라야해’라는 생각이나 ‘나는 이런 것을 잘하니까 이번에도 내가 잘하는 것으로 풀어가야지’라는 접근법은 자칫 여러분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중2병은 귀엽게라도 봐줄 수 있지만 사용자와 고객을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허점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편의점에서 가장 핫 한 맥주 한 캔과 과자를 사서 박스오피스 1위 영화 한 편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어폰 너머로 최신 가요 차트를 플레이하고서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를 구경 가는 것도 강추합니다. 




여담 (餘談)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때 그 구제 청바지 속에 담긴 사연이 진짜였으면 어떡하지? 그 옷 주인이 50cent 나 켄드릭 라마였다면?’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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