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들어간 사람들
'오! 저 사람 센스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이런 말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일을 잘하거나 말주변이 좋거나 대인관계가 훌륭한 것과는 또 좀 다른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같이 일해보면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하게 되죠. 타고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경험치에 의해서 쌓인 것 같은 묘한 스킬.
'센스'란 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센스가 좋은 사람들은 '몰입'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상이 일이든 사람이든 혹은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가리지 않고 어딘가에 깊숙이 빠질 수 있는 사람이죠. 그런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말장난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몰입'과 '몰두'는 한 글자 차이인데 꽤 다른 의미입니다. 몰두(沒頭)는 문자 그대로 머리를 들이밀고 집중해서 그 속을 들여다보는 것을 말하죠. 대신 몰입(沒入)은 안으로 들어가 직접 그 대상이 되어보는 수준에 이르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도 몰두를 하는 사람이 있나 하면 몰입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이 차이는 결과의 차이로도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선 같은 말이라도 표현을 정말 잘하는 경우를 들 수 있겠네요. 텍스트로 작성하는 메일이나 기획서는 물론이고 회의에서 격론이 오가는 와중에도 이를 참 센스 있게 잘 정리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기본적으로 갖춘 매너도 좋지만 정확하고도 섬세한 워딩 덕분에 감정적이었던 분위기를 이성적으로 끌어오는 마법을 부리기도 하죠.
때로는 마치 1분 후의 미래를 본 사람처럼 미리 알고 대처하기도 합니다. 영화 속 히어로처럼 사고가 날 뻔한 순간을 막아주는 정도의 활약을 펼칠 때면 감탄을 넘어 존경의 마음까지 생기는 것 같아요. (아 참고로 저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오해하실까 봐..)
IT 분야는 정말 변화가 빠릅니다. 주니어 시절에는 이 변화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버거울 때가 있었어요. 갑자기 어느 날 간편결제 시장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전자책 분야가 각광을 받고, 서로의 재능을 자유롭게 공유하며 사고파는 플랫폼이 생기기까지... 매일 아침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뜨는 느낌이었고, 덕분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온도에 저를 맞추어야 하는 실정이었죠.
그런데 우주처럼 광활하게 뻗어나가는 업무 범위 속에서도 일을 잘하는 사람은 늘 일을 잘했습니다. 그 비결이 정말 궁금했습니다. 물론 한 가지로 정의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적어도 제 기준에서 일 잘하는 사람은 언제나 '몰입감'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연기를 잘하는 배우 중에 몰입감이 떨어지는 배우는 한 명도 없듯 말이죠. 항아리 속에 머리만 집어넣은 채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웜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아예 그 세계 속에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웹툰 작가 집에서 몇 주간을 같이 먹고 자며 함께 작품 구상을 했다는 콘텐츠 매니저의 이야기, 커뮤니티에 나타난 중고거래 사기꾼을 잡기 위해 회사보다 경찰서로 더 많이 출근했다는 어느 서비스 담당자의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편한 결제 UX를 찾겠다며 지구 반대편 소호 쇼핑몰에서도 직접 직구를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기능 기획자까지.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들의 주인공은 늘 '그들이 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음은 물론이고 사용자, 생산자, 이해관계자를 아우르는 눈이 생기기 시작한 거죠. 사람들이 '타고난 센스', '뛰어난 일머리'라고 부르던 것들이 실제로는 혀를 내두를만한 몰입감과 집요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나니 가만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한동안의 고민거리였습니다. 몰입이 중요한 것은 알겠는데 '그들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나만의 웜홀을 어떻게 열 것인가 하는 문제였죠. 책상 앞에 '몰입!!!'이라고 쓰인 포스트잇을 붙여놓는다고 해서 '어이구 어서 와. 몰입의 세상은 처음이지?' 하며 차원의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몰입을 위해서는 '이해'와 '공감'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들어가려면 그들은 누구이고 어떠한 세상 속에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들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거죠. 그래야 길이 보입니다. 적어도 그들 곁에 발을 붙이고 말을 걸어볼 수 있는 통로 같은 게 생긴다고 할까요?
그다음은 나 스스로 '왜'라는 질문으로 공감대를 넓혀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왜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이 사용자는 왜 A라는 기능을 안 쓸까. 왜 이 브랜드는 제품 가짓수가 현저히 적을까. 왜 이 회사의 마케팅은 자극적이기보다는 겸손할까. 스스로 끊임없는 질문 리스트를 만들고 그에 대한 답을 유추해가는 거죠. 공감이야말로 맞장구가 아닌 질문입니다. 그저 '당신 말이 맞아'라는 태도가 아닌 '저도 그 문제를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볼게요'라는 태도에 관한 것이죠.
우선 구글링과 유튜브에만 의존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둘 다 너무 훌륭한 리서치 도구이지만 몰입을 위해서는 조금 더 밀도 있는 무기가 필요했거든요. 대략적인 온라인 리서치가 끝나면 읽어야 할 책 리스트를 서너 권으로 압축한 다음 짬을 내 읽어내려 갔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단순히 관련 지식을 쌓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이자 자기 최면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읽다 보면 아주 어슴푸레하게라도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왜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인터뷰 기사나 혹은 그 사람이 직접 쓴 글을 읽고 나면 조금은 친해진 느낌이 들잖아요. 카톡 프로필이나 인스타그램 피드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깊이가 있죠. 비슷한 맥락입니다. 그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그 사람들을 이해할 '마음가짐'에 대한 준비인 것이니까요.
한때 일러스트레이터 작가들과 협업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러스트 분야는 정식으로 미술을 전공한 작가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기공학을 전공한 작가도 있고 자동차 영업사원 출신 작가도 있고 수제 쿠키 가게를 운영하면서 부업 삼아 그림을 그리는 작가도 있습니다. 그저 개인 작업물을 휙휙 뒤져보다가 '그림 정말 예뻐요!'라는 말로 다가가기엔 지나치게 거리감이 느껴질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세계에 '진짜로' 닿고 싶었거든요.
늘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 있는 법이죠.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얼마쯤 지났을까요. 작가 개개인 별로 작품을 업로드하는 방식이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작가는 종이에 먼저 밑그림을 그려 스캔한 다음 포토샵으로 채색 작업만 하는가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디지털 작업만을 고수하며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작가는 몇십 년째 오직 캔슨사에서 만든 XL 사이즈의 중량 90g 짜리 스케치북에만 그림을 그리고, 다른 작가는 코픽 멀티라이너 세피아색 0.1mm 펜만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았죠.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그날로 저도 부담스럽지 않은 입문자용 디지털 태블릿을 하나 구입했습니다. 화방에 가서 펜 드로잉에 많이 쓰이는 스케치북과 여러 자루의 펜도 샀죠. 어설프게 흉내를 내거나 이런 것들로 작가들의 환심을 살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이런 도구는 어떤 사용감을 주는지, 이렇게 그리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책이란 분야가 참 신기한 게 '드로잉'이나 '스케치'에 관한 책만도 어마어마한 종류가 있더군요. 심지어 그림을 그리기에 좋은 종이나 도구를 상세히 설명해놓은 책도 있고요. 이런 기회가 아니면 살면서 언제 또 그런 책에 관심을 가져보겠습니까. 틈날 때마다 책을 뒤적이며 아주 조금씩이나마 '그들이 그리는 세상'과 마주하는 거죠.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 한 작가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제가 그림 톤이 좀 특이해서 발색에 관한 부분에 집착을 많이 하거든요. 테스트 과정 동안 마음에 드는 인쇄지가 없어서 그냥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야 하나..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어요, 근데 매니저님이 직접 나서서 종이 한 장 한 장 다 같이 골라주시고 인쇄 감리까지 따라가주시는 모습에 정말 감동했어요. 덕분에 프로젝트 잘 마칠 수 있었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의 벅참이란. 무엇인가를 함께 기획하고 만드는 직업을 갖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예술의 세계를 깊이 이해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니라는 건 여러분도 알고 저도 압니다. 대신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에 함께 몰입하다 보면 종이 중량 1g 차이도 작가 자신에게는 엄청난 변화일 수 있구나 하는 사실에 공감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물론 매번 모든 일을 이렇게 할 수는 없겠죠. 시간적, 물리적, 에너지적 한계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솔직히 깊이 몰입했다고 해서 항상 결과물이 좋으리라는 보장도 없고요. 하지만 언제든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 들어갈 수 있도록 나만의 웜홀을 여는 방법 정도는 열심히 연마해놓는 것이 좋습니다. (이게 또 연습 안 하면 잘 안 열리거든요...) 그리고 어느날 그 순간이 오면 최대한 몰입해서 살아보는 거죠. 마치 처음부터 그 세상에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몰입감이 떨어지려 할 때마다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주인공인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인터뷰를 떠올립니다.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해리 포터를 연기한 소감이 어떤가요?"
"전 해리를 연기한 게 아니에요. 제가 해리포터였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