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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Jan 04. 2021

'낯설음'이라는 변주

익숙한 것들 사이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끼워 넣기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 재미난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제작진이 실험 참가자들의 집에 카메라와 트래킹 장비를 설치하고서 1년 동안 그들의 동선을 추적했는데요, 그 결과 놀랍게도 참가자 전원이 실제 집안 면적의 25%도 채 안 되는 곳만을 이동하며 산다는 사실이 밝혀진 거죠. 가구나 물품이 놓인 곳을 제외하고서라도 늘 다니던 곳으로만 이동하고 늘 머물던 자리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양치질을 할 때도 사람마다 익숙한 동작을 취하기 때문에 어느 부분은 훨씬 많이 닦고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는 곳은 그대로 방치할 확률이 높다고 하죠. 왜 그럴까요? 이는 '선호'나 '기호'의 문제는 아니라고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익숙해진 곳만을 찾아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영역을 만들기 때문이죠. 일종의 '학습 동선'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사를 한지 약 2년 정도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 역시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앉거나 서있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딱히 넓은 집도 아닌데 말이죠) 오히려 마치 최적의 동선을 발견한 신인류처럼 잘 짜여진 루틴대로 생활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달까요.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고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TV를 켜 뉴스 채널에 맞춘 다음, 밤사이 온 메일이나 메시지를 확인하는 그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저 스스로 점점 더 생활의 폭을 좁혀 온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식하면 보이는 법이라고 했던가요. 학습 동선이라는 것에 묘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창의적이고 자유로웠을 때가 언제였을까요? 아마도 어린아이였을 때겠죠? 저는 그 이유 중 하나로 '공간을 100% 활용하는 것'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집에 여섯 살배기 조카가 놀러 오는데 활동량이 박지성 전성기를 능가합니다. 조카 발바닥에 페인트를 칠해놓았다면 진짜 집안의 모든 곳에 발자국이 남았을 겁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학습 동선이라는 게 아직 없나 봅니다. 어딜가나 직접 발로 딛고 손으로 만져봐야 호기심이 충족되니까요.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누구나 책상 밑, 다락, 커튼 뒤, 장롱 속 같은 곳에 숨어들어 놀아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최적의 루트를 찾기보다 맘 가는 대로 살았던 시기죠. 예전에 살던 동네를 찾아가 보면 '이 길이 이렇게 좁았었나' 할 때가 있는데, 제 몸이 커진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무엇이든 넓고 새롭게 바라보던 그 시야가 좁아져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크리에이티브에 관한 강의나 콘텐츠를 많이 찾아보는 편인데요, 그중에서 대부분의 연사들이 늘 공통되게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낯설게 보기' 죠.

익숙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으라는 말도, 반복되는 것들 속에서 새로움을 느끼라는 말도 다 '낯설게 보는 것'에서 시작하니까요. 근데 '낯설게 보라'고만 하지 어떻게 하면 낯설게 볼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사람은 많지 않더군요. 아마도 그 방법은 스스로 찾고 터득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조금은 의식적으로) 학습 동선을 피하는 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낯설게 보려면 관점을 바꿔야 하고, 관점을 바꾸려면 바라보는 위치를 다르게 해야 한다는 단순한 접근에서였죠. 그리고 이 학습 동선이란 것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공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우리 머릿속에도 늘 익숙하게 짜여진 루트가 있고, 그 길을 따라 쉽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니까요.  


재작년 동유럽을 여행할 때 일입니다. 마지막 여정으로 도착한 프라하에서 한껏 야경을 구경한 다음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워 헤밍웨이가 즐겨 다녔다는 작은 술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고풍스러운 공간에 조금은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어울려 마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죠. 바텐더가 어떤 술을 먹겠냐고 묻길래 평소 제 술 취향을 감안해 너무 높은 도수의 술을 제외하고 추천해달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취향의 문제라면, 오늘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는 건 어때요? 익숙한 것에서부터 벗어나려고 여행 온 것 아닌가요? 그럼 여기 머무는 동안은 새로운 것과 마주하고 돌아가야죠." 


순간 '자네 바텐더 집어치우고 한국에서 철학 강의해 볼 생각 없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습니다. 이래서 대문호가 많이 탄생했나 싶은 생각에까지 다다를 무렵 제 앞에 '압생트'라는 술이 놓였습니다. 반 고흐, 애드거 앨런 포, 헤밍웨이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한 술이죠.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속설과 함께 '녹색 요정'이라는 별칭을 가진 압생트의 도수는 70도에 육박합니다.  


"한때는 압생트의 '웜우드(wormwood)' 성분이 정신착란을 일으킨다는 말도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야 근거 없는 소문이었다는 게 밝혀졌어요. 어쩌면 그때의 예술가들은 압생트를 마셨다는 사실에 취한 걸지도 모르죠. 뭔가 새로운 것을 떠올린 게 아니라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랄까요."


그렇습니다. 바텐더의 말처럼 그 옛날 예술가들이 얻은 것은 신적 영감이 아니라 낯설게 볼 수 있는 용기였을지도 모릅니다. 잠시나마 머릿속의 학습 동선을 잊고 평소 가보지 않은 생각의 길을 걸어간 거죠. 



 문제의 그 압생트입니다. 어마어마한 도수지만 의외로 괜찮은 경험이었습니다.



가끔은 '다르게'라는 말이 큰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무엇인가를 기획해서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늘 새롭고 짜릿한' 것에 대한 주문은 강박을 만들어내기도 하죠. 아마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그래서 또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라 그 소리 하려고?' 라며 의심의 더듬이를 세우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못합니다. 매일 핫플레이스를 찾아다니는 성격도 아니고 하루 일상 속 재미난 일들을 모아 인스타그램에 착착 올리는 타입도 못되거든요. 오히려 계획된 시간에, 계획된 것을 하는 게 마음 편한 스타일입니다. (브랜딩이나 마케팅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색채 강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건 커다란 변화라기보다는 '변주'에 가깝습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조금만 다르게 시작하는 거죠. 패션의 흐름이 꾸안꾸라면 일상의 변주는 '변안변 (변한 듯 안 변한)'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늘 읽던 책 말고 새로운 분야의 낯선 책을 골라보는 것. 주말 아침마다 동네 근처 새로운 카페를 한 군데씩 발견해보는 것. 차곡차곡 정성스레 쌓아놓은 플레이리스트 대신 누군가가 추천해 준 음악에 하루를 맡겨보는 것. 옷장에 무채색 옷만 한가득이라면 포인트로 노란색 스니커즈 하나 들여놓는 것. 당장 쓸모는 없어도 왠지 마음이 가니까 그냥 덜컥 사보는 것(물론 적정한 예산 안에서...). 이유도 없이 낯선 동네를 방문해 밥 한 끼 먹고 차 한잔 마셔보는 것. 

유난 떨지 않아도 우리 일상에 변주를 줄 수 있는 것들은 차고 넘칩니다. 


제 지인 중에 유독 운전에 겁이 많아 나이 마흔 가까이 면허 시험조차 응시하지 못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근처에 멋진 바이크를 몰고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더 놀라웠죠.


"운전을 할 줄 모르니까 늘 자전거를 타고 다녔거든. 그러다가 웬만한 자전거를 다 섭렵했어. 결국 전기 자전거까지 탔고 이 속력이면 오토바이도 괜찮을 것 같은 거야. 그래서 이 녀석을 샀는데 너무 만족스러워. 근데 여전히 자동차 운전은 겁이 나. 가만히 보니 나는 차체의 크기나 폭을 가늠할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끼더라고. 바닥없고 뚜껑 없어도 내 몸에 붙어있는 이륜차가 좋아."


'욕심내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조금씩만 변주를 줘보자!'라는 마인드가 생긴 건 그때쯤인 것 같습니다. 늘 독하게 마음먹고 한 번에 방향타를 돌려야 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온 사고방식은 선풍기 바람에 아이스크림 녹듯 녹아내렸습니다. 자동차 운전이 무서우니 애초에 바이크를 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대신 편하고 익숙한 것에서 조금씩 나아가려는 노력이 어느덧 낯선 것을 초월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거겠죠. 


일상을 여행처럼 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선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도보로 30분이 훌쩍 넘는 거리도 걸을만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추천해 준 맛집이 생각보다 별로여도 웃어넘길 수 있는 이유. 꼭 '여행'이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익숙한 것이 없기 때문에 낯선 것에도 덜 어색함을 느낀다고 봐야겠죠. 그러니 여러분의 삶 속에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씩 끼워 넣어보세요. 혹시 아나요. 일상이 여행하듯 조금은 더 재밌어질지도요. 



평소 같지 않으면 뭐 어떤가요. 아니 평소에 나는 또 뭐 어땠다구요!



저는 영화 취향이 좀 편협한 편이었는데요, 최근엔 넷플릭스를 켜고 손가는 대로 꾹 눌러 맘껏 즐기려 합니다.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을 때도 조금은 낯선 위치와 장소를 골라보기도 하고요. 내비게이션 말을 무시한 채 평소와 다른 길로 출근을 해보기도 합니다. 각도를 1도만 틀어도 햇빛이 닿는 면적은 어마어마하게 달라진다고 하죠. 우리의 시야도, 생각도 다 똑같은 것 같아요. 덕분에 요즘은 평소 제 마음이 닿지 않던 곳에 조금씩 길을 터보는 기분으로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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