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영 Jan 31. 2021

수렴의 책, 발산의 책

브랜드 마케터의 브랜드를 통한 책 읽기 

저는 브랜드를 정말 좋아합니다. 명품이나 사치품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 정말 큽니다. (그렇다고 또 명품을 막 엄청 싫어하거나 그렇지는 않... 아무튼) 브랜드가 좋아서 브랜딩 일을 하게 되었고, 브랜딩을 하다 보니 브랜드는 더 좋아졌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가 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오히려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그 많은 것을 어떻게 다 나열하고 그중에서 어떻게 하나만 고를 수 있나 싶어서요. 


대신 '과연 좋은 브랜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래도 나름의 답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브랜드를 만든 사람의 가치관과 브랜드를 소비하는 사람의 가치관이 일치하는 브랜드'


네. 저는 그런 브랜드가 좋은 브랜드라고 생각합니다. 나이키 신발을 살 때마다 '이걸 신으면 나도 더 잘 달릴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애플 제품을 쓰면서 '나는 세상을 더 멋지게 만드는 일을 하는 중이야'라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것, 네스프레소 캡슐 커피를 마시며 '이 정도면 더 바랄 것 없이 충분히 훌륭한 홈 카페인 걸!'하고 느끼는 것. 모두 실제 그 브랜드를 설계한 사람들의 의도대로 소비되는 것들이죠. 이처럼 브랜드라는 매개체를 통해 같은 가치관과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그 현상 자체가 저는 참 경이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게요. 어떻게 이 중에 하나만 고르죠?



그런데 브랜드는 제게 있어 좀 다른 의미로도 특별합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책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준 것 역시 브랜드이기 때문입니다. 선뜻 이해가 잘되지 않죠? 브랜드와 독서라니. 왠지 두 단어는 나란히 있는 게 어색할 정도입니다. 


시작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부분의 대학생이 그렇듯이 저 또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습니다. 경험해보고 싶은 브랜드는 많은데 현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으니까요. 

그때 마침 우리나라에 AESOP(이솝)이란 브랜드가 조금씩 집중을 받으며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와 우연히 가로수길 이솝 매장을 처음 방문했다가 정말 큰 충격을 받았었죠. 나무와 타일만으로 미니멀하게 꾸며진 공간 안에 갈색 병의 이솝 제품들이 줄을 지어 서있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는 겁니다. 매장 안을 타고 흐르는 자극적이지 않은 향기와 친절하지만 요란하지 않게 제품을 설명하는 직원들의 태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근사한 카페에 갔을 때, 한 켠에 화분처럼 자리하고 있던 빈병들이 바로 저 이솝 제품의 공병들이었구나 하는 것을 뒤늦게 알게되자 이솝의 모든 것이 매력적으로 보였죠.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가격이었죠. 맘에드는 향수는 10만원이 훌쩍 넘어가고 왠만한 제품들도 대학생이 부담하기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날 이후 꼭 이솝 제품 하나는 사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솝에 관해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나름 큰맘먹고 사기로 한 만큼 실패하지 않으려 브랜드와 제품을 공부한 것이죠. 


적어도 저에겐, 왠만한 미술관보다 AESOP 매장이 더 아름답습니다.



수렴의 책 


읽다 보니 생각보다 일이 커졌습니다. 처음엔 이솝 브랜드가 좋아서 시작한 것인데 파고 들어가니 흥미로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닌 겁니다. 우선 이솝의 창업자인 데니스 파피티스라는 사람에게 관심이 생겨 그에 관한 책들을 읽었죠. 그러다 보니 그가 이솝이라는 브랜드명을 우리가 잘 아는 이솝우화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이솝우화 전집도 읽었습니다. 전 세계 이솝 매장 중에 인테리어가 같은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기에 디자인 라이브러리에 가서 4시간 동안 이솝 인테리어 디자인 북을 보고, 이솝의 제품 철학인 '자연주의'를 이해하고 싶어서 친환경과 자연주의 운동에 관한 서적들도 봤습니다. 하물며 호주의 이솝 본사 직원들은 모두 BIC 볼펜만을 사용해 일을 한다고 해서 이번엔 BIC라는 회사의 책들까지 읽었죠. 


이렇게 브랜드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땅을 파고 내려가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렴(convergence)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무엇인가 궁금한 게 생기면 그 본질에 닿기 위해 여러 가지 관련 책들을 읽으며 그 거리를 좁혀가는 것이죠. 

저에겐 그 출발점이 브랜드인 경우가 많습니다. 브랜드는 생명체와도 같아서, 브랜드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맥이 같거든요. 그러니 한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을 알아보려면 깊이 들여다봐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물론 그 과정은 어렵기도 하고 시간도 상당히 많이 소요됩니다. 대신 그 여정에서 얻어진 결과물들은 정말 오롯이 저의 것이 되는 거죠. 흡사 브랜드를 만든 사람이 이루고자 하는 원형의 이미지를 함께 공유하는 느낌까지 받습니다. 애매모호하게 제 주위를 둥둥 떠다니기만 하던 형상들을 점점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만들어주는 책 읽기. 바로 '수렴의 책'들이죠.


저는 AESOP 브랜드를 좋아하고 나서 이솝우화를 읽었습니다. 때론 이렇게 순서가 반대가 되기도 하는거죠.



발산의 책 


그 반대도 있습니다. 맘에 드는 브랜드를 탐구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곳까지 관심사가 뻗어나갈 데가 있거든요. 마치 한 인물을 알아보는 과정이 어느 정도 끝나고 나면 이제 그 사람을 둘러싼 배경이 궁금해지는 것과 같죠. 저는 이때가 더 즐겁습니다. 새로운 호기심으로 가득해지는 순간이거든요. 제 관심사가 어디로 튀어 오를지 모르는 그때. 저는 '발산(divergence)의 책'들과 마주합니다.  


다시 이솝 브랜드를 예로 들어볼까요? 저는 이솝에 대해 책을 읽다가 문득 이솝 브랜드가 탄생한 '1987년'에 꽂혔습니다. 그때의 세상이 궁금했던 것이죠. 그 시절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었기에 자연주의 바람이 불고,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시대상이 주목받았으며, 결과적으로 이솝이라는 브랜드가 생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들 말입니다. 모든 브랜드의 탄생은 시대의 맥락 위에 걸쳐져있는 만큼 의도치 않은 역사 공부까지 하게 되는 셈이죠. 


우리에겐 6월 민주 항쟁의 시기로 잘 알려진 1987년은 전 세계적으로도 역동적인 시기였습니다. 석유파동과 냉전시대의 종식을 뒤로하고 맞이한 1980년대 후반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속화되었죠. 당연히 미국을 비롯해 경제 호황을 누리는 국가들이 늘어났고 일본은 자동차, 전자, 금융 등 모든 부문에서 미국을 위협하는 명실상부 세계 2위 국가이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60-70년대 히피 문화의 향수에 젖어있던 세대와 세계화 흐름에 올라탄 세대가 갈등을 빚어, 어느 분야에서나 혼돈이 존재했습니다. 경제 호황과 버블이 함께 성장하던 탓에 제품은 늘 찍어내면 팔리던 시기였고, 따라서 혁신적인 제품도 많았지만 말도 안 되는 품질에 윤리의식이 부재한 제품도 넘쳐나던 때였습니다.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던 대표적인 만평 중 하나입니다.


그런 어지러운 시대 배경 속에서, 어린 시절 이솝우화가 주는 늘 간단하고 본질적인 교훈을 새기고자 시작한 브랜드가 바로 이솝이었던 거죠. 자연성분을 기반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고, 본질적인 최소한의 것만을 남긴 채 깨끗하게 비워두는 미니멀리즘을 먼저 실천하게 된 이유도 그런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시대상을 설명하는 책들을 여러 권 읽고 그 시대에 발간된 소설책들까지 읽은 덕분에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에 대한 인상이 더 선명해진 것이죠. (공교롭게 이솝이 탄생한 1987년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발간된 해이기도 합니다.) 저는 발산의 책이 주는 기쁨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얘기치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접점. 그리고 그 접점들이 연결되면서 보여주는 큰 그림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 그 재미에 빠지면 책 읽는 행위 자체에 더 큰 호감이 생깁니다. 


꼭 직접적인 연관이 없더라도 괜찮습니다. 발산의 방향은 자유로니까요. 저는 브롬튼(BROMTON)이란 자전거 브랜드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영국식 디자인에 빠져들었습니다. 영국에서 오랫동안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한 오경아 작가의 <영국 정원 산책>이나 가장 영국적인 디자인이라는 폴 스미스의 디자인 세계를 다룬 <폴 스미스 스타일>, 문화 인류학자 케이트 폭스가 쓴 <영국인 발견> 같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브롬튼 자전거로 시작된 관심이 영국 문화로 발산되는 것이죠. (심지어 <영국인 발견>에서는 영국의 유머 규칙, 음식 규칙, 섹스 규칙까지도 다루고 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가방 브랜드 포터(PORTER)에 대해 알고 나서는 포터의 창업자인 요시다 기치죠의 장인 정신에 흠뻑 매료되었습니다. 이후 어느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자신만의 철학을 담아 일하는 사람들의 책을 많이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공예 무형문화재 12명의 이야기를 다룬 <몰라봐주어 너무도 미안한 그 아름다움>이나 일본 커피 대가들과의 대담을 엮은 <커피집>, 대한민국 곳곳의 오래된 가게들의 장사 비결을 담은 <노포의 장사법> 같은 책들은 제게 정말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뒤로는 일과 인생에 대한 시각도 조금은 달라진 것 같고요.  


이런 습관이 붙은 뒤로는 브랜드와 책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브랜드를 잘 정리해서 보여주는 매거진이나 유튜브 채널들도 많아서 브랜드 공부하기 매우 편리한 시대지만, 그래도 저는 책을 따라가면서 한 브랜드의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이 무척 즐겁습니다. 전자가 여행사 투어를 통해 유럽 여행을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배낭 하나 짊어지고서 직접 프랑스 시골마을의 작은 골목까지 누비는 느낌이랄까요. 


더불어 꼭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관심사를 정해서 '수렴'과 '발산'의 책 읽기를 해보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수렴의 책 읽기가 '구심력'에 의한 독서라면 발산의 책 읽기는 '원심력'에 의한 독서거든요. 내가 정한 주제의 한 가운데를 깊이 파는 즐거움과 그 주제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해보는 재미를 동시에 즐길 수 있으니까요.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나는 깊이 파기 위해서 넓게 파기 시작했다.' 저는 이 말이 반대로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넓게 알고 싶어서 깊이 알기 시작했다'라고 말이죠. 수렴과 발산. 발산과 수렴. 그 극한을 오가는 경험을 반복하며 내가 가진 세계를 깊게, 또 넓게 확장해가는 것만큼 제대로 된 공부가 있을까 싶네요. 

그러니 지금 무엇인가가 여러분의 관심을 사로잡았다면 바로 거기에 깃발을 꽂으면 됩니다. 그 지점이 수렴과 발산의 시작점일 테니까 말이죠.  




ㅣ 여담 ㅣ 

참, 그 얘기를 안 했군요. 결국 사고 싶었던 이솝 제품은 몇 년 뒤 취업을 하고 나서야 살 수 있었습니다. 우드와 시트러스 향이 조화된 룸 스프레이를 하나 샀는데요, 사회의 첫 발을 내디딘 신입사원의 작은 원룸이 그때만큼은 이솝 매장 부럽지 않은 향기로 가득 채워졌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납니다. 
아, 그리고 스프레이를 허공에 두세 번 뿌린 뒤 혼자 이런 말도 되뇌곤 했었죠.
 
'내가 널 사려고 신자유주의까지 공부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가 20년 전에 왔다면 어땠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