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명심 선생님의 저서 ‘사진으로부터 자유’에 사진의 대가로 평가받았던 프랑스 사진가 라르티그의 예가 있습니다.
내용인즉, “이것은 사진가에게서는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무심의 순수한 반응이었다. 그의 사진에는 전문가의 계산된 예술적 의도나 표현 결과에 집착하기 마련인 잠재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사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인으로 인정받은 후 그의 사진은 순수성이 증발되어 차라리 사후에 사진이 발견되었으면 좋았겠다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련되고 멋진 기교가 오히려 사진의 완성도를 해치다니,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사진을 해야 할까요. 이후 우리나라 1세대 사진작가 현일영 선생님의 예를 들면서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분은 일찍이 우리와 사뭇 다르게 훌륭한 사진, 좋은 사진이라는 걸작주의와 완전히 등을 돌린 사진가였다. ... 사진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적인 의식의 지적인 반성이나 생명 충동의 조건반사, 그것만으로 소기의 목적은 다 이룬 것이었다.”
사진의 완성도보다 자신의 의식과 감정에 철저하게 충실하며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평가를 거부하고 내면적 반응을 표현하는 것. 이것이 현일영 선생님의 사진이라 합니다.
자신에게 집중된 사진은 늘 새로운 사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사고가 비슷하다 할 수 있지만 똑같다고 할 수 없겠죠. 분명 비교하지 않더라도 차이가 생깁니다.
앞으로 결과보다 원인을 더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보다 치열하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