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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경민 Jun 03. 2019

#23 감춤

   사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어느 순간 셔터 누르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사진 행위에 대해 고민하던 중 인식에 따라 존재가 다르게 해석되면서 과거와 현재 정의가 충돌하게 된 것이죠. 사진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은 인식과 존재 그리고 해석의 문제로 나아가면서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따위의 질문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덕분에 철학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지만 셔터를 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당혹스러움은 사진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죠.


대상을 담는다는 것의 의미를 정의하기 힘들었습니다. 명분을 잃어버린 상황이 도래했고 이전에 생각했던 보이면 담는다 라는 것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담을 수 없음으로 양식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보이지 않음의 문제로 고민하던 중 법정 스님의 글귀에서 가능성의 단서를 보았습니다.


   ***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한 모서리에 불과해. 보다 크고 넓은 것은 마음으로 느껴야지. 그런데 어른들은 어디 그래? 눈앞에 나타나야만 보인다고 하거든. 정말 눈뜬 장님들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그 슬기가 현대인에겐 아쉽다는 말이다.


아름다움을 정치처럼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보다는 모독하고 있는 거야. …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아름다움이라면 거죽만 보려는 맹점이 있어.


밖에서 문지르고 발라 그럴듯하게 치장해 놓은 게 아름다움은 물론 아니다. 그건 눈속임이지. 그건 이내 지워지고 마니까. … 두고 볼수록 새롭게 피어나야 할 거야. 그러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하나의 발견일 수도 있어. 투명한 눈에만 비치기 때문에.


그들은 모르고 있어. 감추는 데서 오히려 나타난다는 예술의 비법을. 현대인들은 그저 나타내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감추는 일을 망각하고 있어.


그런데 아름다움은 누구에게 보이기 전에 스스로 나타나는 법이거든. 꽃에서 향기가 저절로 번져 나오듯. … 그러나 그 꽃은 누굴 위해 핀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기쁨과 생명의 힘으로 피어난 것이래.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안에서 번져 나오는 거다. 맑고 투명한 얼이 안에서 밖으로 번져 나와야 한단 말이다."

   ***


투명한 눈과 얼, 감춤으로 나타남을 인식하고 존재의 무위를 발견하는 것. 그제야 존재자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음이 보이나 봅니다. 누름의 가능성을 발견하고도 쉽지 않습니다. 사진은 여전히 배울 것 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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