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자유인으로 상징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입니다. 막연히 자유인이 되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기실 그만큼 고통이 따르는 것이 자유인의 삶이죠. 김영갑 작가님을 보면 문득 그리스인 조르바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의 글입니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어 홀로 걸었다. 자유로운 만큼 고통도 따랐다. 그러나 자유로운 삶의 어두운 부분도 내 몫이기에 기꺼이 감수했다. ...혼자선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 혼자이길 원했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p26>
"시작이 혼자였으니 끝도 혼자다. 울음으로 시작된 세상, 웃음으로 끝내기 위해 하나에 몰입했다. 흙으로 돌아가, 나무가 되고 풀이되어 꽃 피우고 열매 맺기를 소망했다." <그 섬에. p254>
외로움 속에서 사진을 찍었던 김영갑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자연과 하나 된 사진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가 사진에서 표현한 바람의 흔적은 일반적인 장노출 사진이 아닙니다. 1957-2005 김영갑 사진집의 첫 번째 사진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무입니다. 파노라마 카메라로 나무를 길게 늘어지게 놓았고 프레임 바깥에서 안쪽으로 흔들리며 들어오는 나뭇가지는 마치 손을 흔들듯이 사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바람에 의해 사진은 흔들렸지만 경계는 선명하게 표현되었습니다. 흔한 다중노출 사진은 아니지요.
바람의 흔적을 경계 지어 사진으로 표현하기란 힘든 일입니다. 바람이 사진 속에서 보인다는 것은 무엇인가의 홀림이며 이 홀림은 환영을 만들어 마치 사진이 역동적으로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나뭇결에 변화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은 바람입니다. 바람을 통해 수채화의 그림처럼 김영갑의 사진은 불분명한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번짐으로써 존재를 드러내려 합니다. 자연 그대로 그려지는 수채화가 되도록 공기 중 수분은 바람을 동력 삼아 필름 깊숙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진작가로 알려지고 지금은 예술가인 김아타 작가님의 작품 명제입니다. 사진에서 장노출을 이용한 사라짐의 표현은 흔하고 단순하지만 그의 철학을 통한 설명은 심오하면서 복합적이죠. 제주 풍경 중에서도 장노출로 사라짐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김영갑의 사진에는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공존합니다. 바람은 사라짐을 일으키지만 그 일으키는 순간을 사진으로 잡는다면 흔적이 남게 되죠. 김영갑의 사진은 그 흔적의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마치 바람이 정해준 노출을 그대로 알고 계산해서 찍은 듯한 사진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이 너무 길면 나뭇잎은 사라지고 너무 짧으면 바람의 역동성은 사라집니다. 이 사라짐의 경계에서 자연이 정해준 순간을 정확하게 알고 사진에 담습니다.
그의 사진은 순간의 기회를 노력에 의해 포착한 것보다 과정에서 느껴지는 서사가 있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한 자연의 흐름 속에서 솟아 나오는 미지의 힘인 그 무엇이 사진에 있는 것이죠. 그는 궁극적으로 자연 가까이 보이는 현을 찍은 것이 아니라 은을 현상화했습니다. 그가 찍었던 것은 제주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홀림이고 묘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