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의 소설 <깊은 강>에서 산조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자신은 일류 카메라맨이 되고 싶다면서 사진을 찍기 위해 갠지스 강 화장터로 가죠. 하지만 그곳은 촬영 금지 구역이고 산조는 가기 전 이렇게 거짓말합니다.
"로버트 카파가 말했어요.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카메라맨은 걸작을 찍을 수 없다고. 인도인들이 말하는 노-프라블럼입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화장터는 안 찍을 거예요." p310
결국 무리하게 사진을 찍은 산조 때문에 다른 주인공이 어려움을 겪게 되죠. 산조의 열정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한 번씩 제가 찍어놓은 사진을 보며 그런 생각이 합니다. 대상 자체를 보고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원하는 장면이 필요해서 대상을 이용한 것 아닌가 라고 말이죠. 오로지 나의 욕망을 위해 사진을 찍었을 때 대상은 도대체 어떤 의미로써 나에게 다가오는 것일까요. 진실된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금방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대상은 한 번 이용되고 마는 소모품이 되었습니다. 명분과 철학은 사라지고 기술만 남은 체 마치 산조의 대사처럼 읊었습니다.
"모든 게 요령, 요령이지." p311
오로지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함은 타자가 없기 때문에 관계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배려는 상실되고 존재는 나를 위함만 있을 뿐입니다. 엔도 슈사쿠는 이 욕망의 심리를 정확하게 읽었습니다.
금지이긴 하지만 어떡하든 몰래 찍고 싶다. 일본인 사진가 어느 누구도 이러한 광경을 찍지 않았다는 것을, 신참이지만 산조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촬영에 성공하면 일류 사진 잡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넣어 게재해 주겠지.
사진은 사상이 아닌 소재다. 그래서 인도를 신혼 여행지로 선택했다. 로버트 카파 역시 전쟁터라는 극적인 장면이 없었다면 세계에 이름을 떨치지 못했으리라. p312
윤리가 사라진 상황에서 사진은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요. 소유 욕망은 대상과 유대감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나는 대상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얼마나 진실된 마음으로 다가가고 있는지 사진을 찍기 전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