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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액 대신 눈치를 맞습니다.

병원 사모의 거리두기 내조

by 월량

12:35

"죄송합니다. 오전 진료 마감되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가쁜 숨을 쉬고 계신 구부정한 할아버지께서 간호사들의 냉랭한 답변에 아무 말도 못 하시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되돌아가셨다.



나는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님, 어서 들어오세요, 진료 봐드릴게요!'

내가 대신 그렇게 외쳤어야 할까.


남편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오전 진료 마감 20분 전 병원을 찾았던 시간이었다.

'아직 진료 종료까지 20분이 더 넘게 남았는데, 불편한 몸 이끌고 찾아오신 어르신을 그냥 되돌려 보내는 것이 맞는 걸까?

그렇다고 내가 나서면, 간호사선생님들이 불쾌하게 느끼실 것 같아. ‘

그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끼어드는 순간, ‘사모가 와서 이것저것 시킨다 ‘며 간호사들이 원장님께 불만을 제기할 수 있다.

‘그만두겠다’는 말이 따라붙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 켠에는 간호사들의 차가운 대응에 섭섭함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리 병원에 1년에 두세 번 방문할 정도로 잘 가지 않는다.

나의 방문이 썩 반갑지는 않을 것 같아, 갈 때마다 꼭 커피와 맛있는 간식을 사들고 가는 편이다.


개원 5년 차까지는 주로 몸이 안 좋을 때마다 영양수액을 맞으러 가거나, 병원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남편과 점심을 함께 먹기 위해 종종 들렀다.


집에서 매일 아침 밤으로 만나지만 점심에 좋아하는 도시락을 사들고 깜짝 방문을 하면, 남편이 활짝 웃으며 반가워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점심을 같이 먹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잠깐의 데이트를 즐기고 돌아오곤했다.





얼마 전, 만성피로로 수액을 맞으러 갔다.

새로 온 간호사가 와서 수액을 놔주려는데 혈관을 제대로 못 잡고 두세 번 찔렀다가 실패했다.

괜찮다고, 다시 해보시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내심 걱정도 되었다.

'환자분들은 여러 번 찔리는 거 싫어하실 텐데...'

남편에게 물어보면 ‘긴장해서 그랬을꺼야’라고 답하며 넘긴다. 그래, 그런거면 정말 다행이다.



진료대기실에 앉아있다 보면, 평소에 없던 '매의 눈'이 발동되기 시작한다.


'어! 화분에 식물이 다 죽어있네?'

'잡지칸에 왜 재작년 잡지가 꽂혀있는 거야?'

'TV에 예능이 아닌 건강상식채널을 틀어놓는 건 어떨까?'

'수액실에 '휴대폰 통화 금지'라는 문구스티커를 붙여놔야할 것 같은데?‘


여러 생각들이 들기 시작하면 슬슬 피로감이 몰려온다.

남편에게 의견을 전달하면, '그럴 수도 있지, 허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결국은 내가 자주 들락거리면서 고쳐나가야 할 텐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한 때는 답답한 마음에 ‘차라리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서 병원 데스크에 앉아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알고 지내던 사모님이 웃으며 말하셨다. “직원 공백때문에 두 달만 봐주러 왔다가, 어느덧 이십 년째 앉아있게 되었네요. 간호사들도 알고 나면 다 그만둔답니다. 절대, 잠깐이라도 들어가 일하지 마세요“


'가족 같은 직원'은 정말 없는 걸까?

내가 요즘 시대에 너무 꼰대 같은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고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MZ간호사들의 당당한 요구를 존중하려 애쓰고, 늘 직원들과 화기애애하게 잘 지내려 노력하는 남편을 보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일부러 병원에 가지 않는다.

보지 않고, 관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남편을 돕는 길임을 이제는 안다.

현명한 내조는 간섭 대신 거리두기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난 오늘도 병원 대신 카페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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