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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량 Nov 14. 2024

슬기로운 감옥생활

썩소가 미소로

나는 환자인가, 자유부인인가?

얼굴은 영락없는 환자인 것 같은데, 몸은 또 너무나 멀쩡하다.

또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 말 그대로 '자유부인'인데, 찬 바람을 쐬면 좋지 않아 외출도 자제해야 한다.

여기는 "No 스트레스"를 지키는 게 규율인 1인실 수용소다.




처음 '구안와사(안면마비)'를 맞닥뜨린 날 저녁.

환절기의 최악의 면역력과 스트레스, 과로가 겹치면서 결국 입은 돌아가고, 눈은 감기지 않았다.

푸석한 얼굴로 서럽게 우는 나를 보고 남편은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평소엔 서로가 더 힘들다고 지지 않고 맞선 우리였는데, 의도치 않게 내가 승자가 되었다.


'남의 편'인 줄만 알았던 그가 내 편임을 알게 된 건, 그날 밤, 그의 근심 어린 표정과 따뜻한 권유였다.

절대안정해야 낫는다고, 쉬고 싶을 때까지 아무 생각 말고 회복에 전념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안면신경마비는 치료법은 매우 간단하지만, 회복속도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고용량 스테로이드약을 한 달간 복용하고, 계속해서 얼굴을 마사지해 주고, 면역이 떨어지지 않도록 충분한 수면, 영양가 있는 음식, 스트레스 없이 잘 쉬면 되는 것이다.

신경이 돌아오는 속도는 빠르면 한 달, 늦게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하고, 후유증을 남기기도 한다.




이로써, 캐리어에 무거운 마음과 설렘을 반반 싣고,

1502호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열흘 간 묵게된 집근처 호텔. 아이들은 엄마가 병원에 입원 중인 걸로 알고있음^^;;


하지만, 나는 '자부'가 아닌, '환자'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이곳에서 최대한 "노 스트레스"를 유지해야 했기에,

영화나 예능 같은 자극적인 것들은 일절 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스트레칭, 독서, 음악 감상, 글쓰기, 차 마시기, 푹 자기, 명상, 기도 등

단조롭지만 평온한 루틴이 자리 잡았다.



처음으로 시켜 본 룸서비스.  미국식 브런치 조찬.


그 좋아하던 커피와 빵도 내키지 않는다.

여기서의 제일 신기한 변화이다. 오일째 커피가 생각나지 않는 내가 무척 새삼스럽다.

오후 3시쯤이 되면 득달같이 빵과 과자를 입에 구겨 넣었던 내 모습이 마치 예전일 같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아마도 커피와 빵과 같은 디저트가 내 스트레스에게 주는 마약과 같은 선물이었으리라.





이쯤에서 내 안의 양심이 살짝 꿈틀댄다.

바로 "가족의 희생"을 언급 안 할 수가 없다.

이곳에서 지내는 문득문득 생각했다.

말 더럽게 안 듣는 열한 살, 아홉 살 아들 둘과 고군분투하고 있는 친정엄마와 아침밤으로 아이들 케어하느라 똥줄 타는 우리 남편의 식은땀을 떠올리게 되면, 미안한 마음 한가득이다. (솔직히 남편한테는 5% 사이다 느낌, 왜일까?)


마라토너도 아닌데, 그동안 쉼 없이 너무 달려왔다.

육아만으로도 벅찬데, 틈틈이 과외와 강사일로 열심히도 지냈다.

이 와중에 무슨 학위를 딴다고 욕심을 냈다가, 결국 이 사달이 났다.




요즘은 나처럼 안면신경마비에 걸리는 젊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예방하는 방법은 충분한 수면, 영양가 있는 식단, 스트레스 없는 생활이 전부이다.


'바디프로필'이 유행한 이후로 많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너도나도 몸짱열풍이 불었었다.

그리고 유행처럼 번진 '골프'와 '러닝'. 운동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하지만 '충분한 수면'에 대한 중요성은 늘 뒷전이다.

나 역시 건강과 다이어트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오전일과시간에 모두 운동으로 쏟아부었다.

이번 일을 몸소 겪으면서 내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건강비결은 '수면의 질'이다.


하루 7~9시간을 자야 삶의 만족도가 가장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직접 체험해 봐야  알게 되는 일상의 당연한 것들.

열 흘간의 슬기로운 1인실 감옥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들이 따뜻한 포옹과 다정한 안부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동안 엄마 속을 시커멓게 태워놓고, 엄마의 빈자리를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채우고 있었을 아이들.

왠지 모르게 철이 바짝 들은 느낌이다.

엄마가 힘들까 봐 표정을 살피기도 하고, 떼를 쓰다가도 '아 맞다' 하고 숨을 고르는 둘째를 보면서 새삼 기특한 마음이 든다.



"별은 가장 어두울 때, 가장 밝게 빛난다."



어쩌면, 함께 겪은 이 짙은 어둠이 우리를 더 빛나게 해 준 건 아닐까.

힘든 순간을 함께 이겨내며 비로소 가족의 진정한 힘을 느꼈다.

나로 인해 가족 모두가 유독 힘들었던 올해 가을,

우리 가족은 그렇게 더 깊어지고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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