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 다이어리/ 캐럴 실즈/한기찬/비채>
다이어리라는 제목부터가 편안하게 다가왔다. 글의 내용도 마치 일기처럼 쉽게 읽힐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그러나 책의 맨앞장에 있는 거미줄 같은 살벌한 가계도를 보는 순간 암담해졌다. 특별히 가계도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요즘 읽는 책마다 가계도가 마치 필수인 것처럼 등장하니 지겨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잘난 나만의 가계도를 그려가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도 이제는 솔직히 지긋지긋하다.
그러나 이게 웬걸.....반전이라고 해야하나....이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복잡한 가계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가계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인물들의 이름은 그냥 가계도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도 없다. 이 소설은 비중 있는 인물들 몇명이 이 이야기의 전체를 이끌고 가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지의 아들과 딸들도 별로 비중이 없지만 그들이 결혼한 남편과 아내, 손자 손녀들은 마치 소품처럼 이름만 몇 번 언급될 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섭섭하리 만큼. 그래서 이 책은 내가 원했던대로 그저 술술 읽어나가면 된다. 복잡한 가계도에 절대 쫄아선 안된다. 출판사에서는 책을 좀더 많이 팔려면 이 복잡한 가계도를 과감히 없애버리는 게 더 유리할 것이다. 전면에 있는 가계도를 보고 쫄아서 책 사기를 포기하는 나같은 독자들이 분명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출판사의 책 판매까지 신경을 쓰는 건 이 책이 그만큼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이런 좋은 책은 많이 팔려야 한다. 이 정도면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손색이 없다.
나에겐 더없이 사랑스러운 소설이 아닐 수 없다. 뭔가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부터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문장과 분위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런 류의 소설을 읽으면 문장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행복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군훈련소에서 건빵을 간식으로 처음 받은 날 밤, 그 천국 같은 비현실적인 맛을 조금이나마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 담요를 머리까지 덮어쓰고 아껴아껴가며 조금씩 오물거렸던 것처럼 이 책도 책장을 넘기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퓰리처상 수상작 중에 내가 읽었던 책으로는 그 유명한 '앵무새 죽이기'와 '로드', '총균새' 등이 있다. 뭐 별로 없네..암튼 퓰리처상을 받은 책이라면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총균세 빼고..) 나의 단순한 독서 지론입니다. 우선 책 고르기 쉽잖아. 그리고 고매하신 평론전문가님들께서 어련히 검증도 잘 하셨을테고..
이 소설은 한마디로 한 여자의 평범한 일생을 자전적이면서도 다양한 형식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나는 굴곡지고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막장드라마적인 요소까지 갖춘 극단적인 내용보다는 이런 류의 이야기가 좋다. 이런 평범함이 나에겐 오히려 더 생생하게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소설은 여성의 시각이 잘 드러난 소설이다. 주인공 데이지는 현모양처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모범적으로 살았지만 말년에 자아를 잃어버린 듯한 극심한 상실감에 시달린다. 그녀는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자신의 일을 할 때였다. 데이지의 양모인 클레런턴도 어느날 갑자기 남편을 떠나버린다. 표면적 이유는 치과치료비를 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었지만 내부적으론 남편과 가정의 부속물에 불과하며 진정한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지 못했던 자기 인생과의 작별이었을 것이다. 머시 스톤도 남편의 열렬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만큼 행복함을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 소설의 여자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모범적이거나 평범한 남편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상실감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이런 류의 주제는 자칫 진부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이 소설은 대놓고 여자들의 상실감과 우울감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런 주제를 표내지 않고 독자 스스로 감을 잡기를 바란다. 아니, 바라지도 않는 것 같다. 그 여자들이 자신의 자아를 정말 잃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닐 수도 있다. 이유가 남편 때문인지, 갱년기 때문인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서인지는 그 어디에도 직접적으로 거론되진 않는다. 물론 데이지는 일이 끊기고 나자 극심한 우울증을 겪는다. 그래서 연관지어 추측할 뿐이다.
신입 시절, 자신은 현모양처가 되는 게 꿈이라는 걸 입에 달고 살았던 여자가 문득 떠오른다. 유일한 총각이었던 내가 있을 때는 그 점에 대해서 유독 강조를 하며 남편은 어떻게 내조를 해야 그를 성공가도로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신념을 자랑하듯 말하곤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에 현모양처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현모양처가 부담스럽고 무서웠다. 여자로부터 내조를 받거나 아이를 낳고 싶은 이유로 결혼 같은 것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지레 피하고 다녔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그녀가 찌질하기 이를 데 없는 나같은 총각 따위는 내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에 나는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은 항상 잘 마셨다.
그녀는 어딘가에서 자신이 의도한대로 현모양처로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한껏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행복해 할 것이다. 현모양처로서의 삶이 바로 그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그 자체였기 때문에 가능한 행복이리라. 부디 꼭 그렇기를 바래본다. 그리고 좋은 어머니이자 아내가 되는 일이 그녀를 속박하는 굴레가 되는 일은 없기를.
나에게 이 소설의 백미는 마지막 10장의 죽음이다. 가장 몰입해서 읽었던 장이기도 하다. 서서히 늙어가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건 결코 낭만적인 일이 아니다. 오히려 비참하고 가혹하고 끔찍한 형벌에 가깝다. 이 죽음이라는 끔찍한 공포를 감당하지 못해 인간은 종교를 만들었고 그의 신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을 믿지 않는 나는 이 죽음의 공포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 신체적 기능이 하나씩 고장이 나기 시작하는 늙어가는 엄마를 생각하면 내면 깊숙한 곳에 잠재해 있던 근원적인 고통과 슬픔이 스멀거리며 올라온다. 그러나 이 비참한 노년과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니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근데 그게 잘 안 된다. 나의 늙음과 죽음은 차치하더라도,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절대 용납이 안 될 것 같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마도 나는 그 고통을 날것 그대로 온몸으로 받으며 인간의 삶과 인생과 죽음과, 있지도 않은 신을 원망하며 온갖 저주를 퍼부어 댈 것이다.
나만의 인생, 후회없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과연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이기나 할까.. 이 또한 강박증처럼 따라다니며 우리를 구속하거나 기만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건 애초부터 요원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살던 결국엔 망가져가는 육신과 더불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필수 코스처럼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는 후회와 회한으로 죽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없는 인생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라고 이야기 해야겠지.
그리고 지금은 별다른 뚜렷한 대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다가올 종말의 끔찍하고 잔인한 노화와 죽음에 대항해서는, 그때가 되면 혹시나 고결해져 있을지도 모르는 나의 영혼이 당당이 맞서 주기를 기대해 보는 수밖에...